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9 ; 영화 제작자 - 피터 잭슨 (Peter Jackson)
<1961년 10월 31일~>
판타지 영화 '반지의 제왕' 으로 '영화의 제왕' 되다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을 만들기 전 나름대로 원칙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할리우드 입김이 세다고 하더라도 영화예술인으로서 결코
‘기죽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할리우드가 자신에게 명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곧 세계가 알아주는
명 감독이 될 자신을 잘 알아 모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다섯 살 어린아이와 일흔 살 늙은이의 말을 유심히 들어 보라. 그들이 하는 말은 아주 엉뚱하거나 흘려듣기에는 귀중한 것이 너무 많다. 보통 사람이 생각하는 것으로는 결코 튀거나 성공할 수 없다. ‘뉴질랜드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영화감독 피터 잭슨, 그는 ‘엉뚱함’을 ‘진지함’으로 바꾼 사람이다.
존 로널드 톨킨(J. R Tolkien, 1892~1973)이 쓴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전 3권) 연속물을 영화로 만들어 전 세계 영화계를 뒤흔들어 놓은 잭슨은 고국 뉴질랜드에서는 ‘컬트영화의 거장’, 미국 할리우드에서는 ‘블록버스터의 제왕’으로 불린다. ‘판타지 영화계의 신’이라는 극존칭도 따라붙는다.
‘컬트영화의 거장’ 핼러윈 데이에 태어나
피터 잭슨은 1961년 10월 31일 웰링턴 푸케루아만(Pukerua Bay)에서 태어났다. 훗날 ‘컬트영화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려고 했는지 공교롭게도 그날은 핼로윈 데이였다.
아홉 살의 어느 날 잭슨은 텔레비전에서 영화 ‘킹콩’을 보았다. 1933년에 만든 ‘킹콩’은 그 나이 또래 어린아이들에게는 ‘환상’ 그 자체였다. 킹콩과 한 여인의 애틋한 사랑보다는 괴수 같은 킹콩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어린 잭슨은 부모님이 사준 8mm 비디오카메라를 받아 들고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꾸었다. ‘아홉 살 인생’의 하루가 서른 해 뒤 세계 영화계 판도를 뒤집게 된다.
데뷔작은 1987년에 나온 코미디 영화 <배드 테이스트>(Bad Taste, 고무 인간의 최후)였다. 4년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그의 고향 웰링턴에서 상영됐다. 말하자면 동네 시사회였다. 출연료를 줄 수 없어 동네 친구들을 배우로 끌어들였다. 이 영화는 적은 자본과 갖가지 특수효과로 웰링턴에서 화제를 일으켰다. 피터 잭슨은 감독, 배우, 각본, 의상, 특수 효과를 맡았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만든 작품이었다.
<배드 테이스트>에서 그는 스물세 번이나 죽는 연기를 했다. 열악한 제작여건에도 불구하고 차별화된 내용과 특수효과로 입소문을 타 칸 영화제에 초대를 받았다. 정통 영화의 틀을 벗어나 신선함이 돋보인 이 영화는 10여 개 나라에 수출되면서 영화애호가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컬트영화의 클래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반지의 제왕’으로 아카데미 상 받아
피터 잭슨은 생계를 잇기 위해 짬짬이 해오던 텔레비전 방송국 연출 일과 신문사 사진기자 일을 과감히 때려치우고 스크린 세계로 뛰어들었다. 공포영화 몇 편을 더 만들어 기량을 뽐낸 잭슨은 드디어 전 세계 영화 애호가들에게 환호성을 얻은 ‘반지의 제왕’의 메가폰을 잡았다.
그는 <반지의 제왕>을 만들기 전 나름대로 원칙이 하나 있었다. 아무리 할리우드 입김이 세다고 하더라도 영화예술인으로서 결코 ‘기죽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할리우드가 자신에게 명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곧 세계가 알아주는 명 감독이 될 자신을 잘 알아 모실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때’가 왔다. 할리우드에서 그를 알현하게 하였다. 피터 잭슨은 영화 <반지의 제왕>으로 10여 개가 넘는 아카데미상을 받으며 특유의 말발을 입증했다.
<반지의 제왕> 연속물은 영화계에 남다른 기록을 남긴 작품이다. 피터 잭슨은 <더 펠로십 오브 더 링>(The Fellowship of the Ring, 반지 원정대), <더 투 타워스>(The Two Towers, 두 개의 탑), <더 리턴 오브 더 킹>(The Return of the King, 왕의 귀환) 작품 세 편을 같은 기간에 찍고도 영화 애호가의 애간장을 태우며 2년씩 시차를 두고 스크린에 올렸다.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영화는 찬사를 받았으며 그 흥분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영화평론가들은 <반지의 제왕>을 만든 피터 잭슨에게 올리버 스톤(Oliver Stone, 미국 영화감독, <플래툰> 감독)과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Spielberg, 미국 영화감독, <쥬라기 공원> 감독)에 버금가는 ‘영화계의 천재’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릴 적 꿈 <킹콩> 영화 다시 만들어 성공
잭슨은 언젠가 <킹콩>을 다시 한 번 멋지게 만들어보겠다는 어릴 적 꿈을 나이 마흔이 넘어 이뤄냈다(2005년). 세 시간이 넘는 큰 작품 <킹콩>을 훌륭하게 스크린에 재연해낸 잭슨은 ‘그가 만들면 또 다른 전설이 된다’는 최고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계 거물로 자리를 잡았지만 고향 사람들은 그를 아직도 ‘영원한 철부지 영화쟁이’로 기억하고 있다. 영화를 만들 돈이 없어 여러 소품과 특수효과를 직접 만들어낸 대책 없는 괴짜로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매서운 웰링턴 날씨에도 늘 반바지 차림으로 메가폰을 잡은 배불뚝이(영화 <킹콩>을 만들면서 30kg 넘게 살을 빼기는 했지만) 영화감독으로 말이다.
피터 잭슨은 <반지의 제왕>을 찍기 전 헬리콥터를 타고 뉴질랜드 전국을 돌았다. ‘그림 같은’ 촬영장소를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피터 잭슨이 보여준 ‘뉴질랜드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웰링턴에 영화사를 세우고 스튜디오를 직접 만들었다. 잭슨은 지금도 뉴질랜드 영화산업 발전에 자기 이름값에 걸맞게 든든한 정신적 맏형 역할을 하고 있다.
자유인 참모습 느끼게 해줘
피터 잭슨을 보면 ‘자유인’을 느낄 수 있다. 자유분방하게 살면서도 남다른 예술 세계를 펼쳐 보이는 모습에서 우리는 예술이 주는, 영화가 대중에게 보여주는 즐거움을 느낀다.
《아홉 살 인생》이란 책이 있다. 아홉 살짜리도 삶을 알 수 있다는 내용의, 짧지만 뜻은 깊은 위기철의 철학 소설이다. ‘엉뚱한 꿈을 꿀 수 있는 아홉 살 인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즐거운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혹시 내가 그때 꾼, 아니 우리 아들딸이 지금 꾸고 있을 지도 모를, ‘괴상한 꿈’이 언젠가 우리도 모르게 현실로 다가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금은 헛된 망상을 한다면 사는 것이 조금은 더 ‘영화 같지’ 않을는지….
글_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