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8 ; 군인 - 찰스 어팸 (Charles Upham)
<1908년 9월 21일~1994년 11월 22일>
겸손과 용맹으로 무장한 2차 세계대전 영웅
독일군 둘을 상대로 벌인 깜짝 전투는 더 생생하다.
올리브 나무 숲 속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됐을 때, 찰스 어팸은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한 발 두 발 찰스 어팸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적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 하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또 다른 적군이 달려들자 비호 같은 솜씨로 화염을 토해냈다.
2판 2승이었다.
수천 년 인류 역사가 이어져 오는 동안 전쟁이 없었던 해를 꼽기 힘들다. 사람들은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한다”고 말하지만 전쟁으로는 결코 평화를 얻을 수 없다. 전쟁이란 ‘꼭 이겨야 하는 싸움’이라, 그 속에서 숱한 말 못할 비화가 터져 나온다.
전쟁은 영웅도 배출한다. 나라를 위해 누군가가 희생하고 나라는 그 고귀한 희생에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명예를 안겨준다. 명예는 훈장에 스며 있으며 그 훈장은 ‘영웅’을 묵묵히 말해 주고 있다. 뉴질랜드 전쟁 영웅 찰스 어팸, 그가 받은 두 개의 훈장에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교훈이 담겨 있다.
어렸을 때 꿈은 평범한 ‘양 목장 주인’
찰스 어팸은 1908년 9월 21일 크라이스트처치에서 태어났다. 돈 많은 농부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그랬는지 찰스 어팸은 자기도 양을 키우며 사는 농장 주인이 되기를 꿈꿨다. 크라이스트 칼리지(Christ’s College, 1850년 설립)를 마치고 캔터베리 농업대학(Canterbury Agricultural College, 현재 Lincoln University)에 들어가 농업 학사 학위를 받았다.
산 높고 물 깊은 남섬 곳곳에서 농장 일을 배우던 중, 삶은 예상치 않은 길로 빠져들었다. 1939년 2차 세계대전이 터졌을 때 어팸은 나이가 서른이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고 ‘소박한 꿈’만을 향해 풀밭을 맘껏 누비던 때였다.
뉴질랜드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찰스 어팸 이름도 징집 명단에 올랐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수많은 젊은이와 함께 제2차 뉴질랜드 파견대의 한 사람이 되어 싸움터로 떠났다. ‘정의가 반드시 이긴다’는 확고한 신념은 그를 양이나 돌보는 ‘그저 그런’ 젊은이로 놔두지 않았다.
1941년 3월 찰스 어팸은 중위로 진급했다. 사병에서 시작해 장교 대열에 선 그는 뛰어난 통솔력으로 부대에서 누구보다 유명했다. ‘군인이 되려고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전쟁터 곳곳에서 진가가 드러났다.
올리브 나무 숲에서 벌인 2판 2승
지중해 동남부에 있는 크레타 섬, 대포 연기가 쉬지 않던 그곳에서 찰스 어팸은 첫 번째 훈장을 따내는 공적을 쌓았다. 비 오듯 쏟아지는 박격포 세례를 뚫고 독일군 초소를 무너뜨리는 ‘연합군기 휘날리며’의 일등공신에 올랐다. 찰스 어팸은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홀로 쳐들어가 적군 스물둘을 무찌르는가 하면, 고립무원의 악조건 속에서도 동료들을 구해내는 영웅적인 일을 감당해 냈다.
독일군 둘을 상대로 벌인 깜짝 전투는 더 생생하다. 올리브 나무 숲 속에서 독일군에게 포위됐을 때, 찰스 어팸은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었다. 한 발 두 발 찰스 어팸 앞으로 발걸음을 내딛는 적군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적군 하나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고 또 다른 적군이 달려들자 비호 같은 솜씨로 화염을 토해냈다. 2판 2승이었다.
뒷날 찰스 어팸에게 ‘퍼그’(Pug, 소형기관차 또는 불도그 비슷한 자그마한 발바리)라는 별명이 붙었다. 그가 얼마나 맹렬하게 싸웠는지를 잘 보여주는 호칭이다. 이 전투에서 그는 팔과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다. 결국 팔 하나를 잘라야 했다.
해가 바뀌었지만 전쟁은 끝날 줄 몰랐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크고 작은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져 나가던 그때, 찰스 어팸은 북아프리카 이집트에 있었다. 1942년 7월 ‘9일의 전투’로 불리는 루웨이삿(Ruweisat Ridge) 싸움에서 찰스 어팸은 또다시 빛나는 전투력을 뽐냈다. 앞으로 나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치열한 한판 전투였다. 찰스 어팸 앞에 놓인 조건은 최악이었다. 모두 죽을 지도 모를 큰 위기였다. 지원사격은 이미 끊겼고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거미줄처럼 촘촘히 숨통을 조여왔다. 찰스 어팸은 홀로 돌파해 나갔다. 박격포 기지를 무너뜨리고 고립 상태에 있던 아군을 구출했다. 동료 여섯과 함께 포로로 잡혔지만 찰스 어팸은 이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성 덕분에 두 번째 훈장을 탔다.
포로수용소에서 끊임없이 탈출 시도
찰스 어팸은 수용소에서도 ‘퍼그’였다. 감시가 조금만 소홀하다 싶으면 영락없이 탈출을 감행했다. 안타깝게도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눈엣가시’ 같았던 그는 연합군 장교로서는 처음으로 악명 높은 ‘콜디츠 포로수용소’(Colditz Camp)에 갇혔다.
찰스 어팸이 풀려나기까지 몇 차례 탈출계획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를 말할 때 무엇보다 ‘수용소 탈출기도사건’을 빼놓지 않고 얘기할 만큼 불타는 전투력은 수용소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포로 생활을 끝내고 영국에 잠시 머물면서 그는 8년 전 뉴질랜드에서 약혼한 몰리(Molly)와 다시 만나 결혼했다. 그 사이 찰스 어팸은 훈장 두 개를 받았다. 군인에게 주는 제일 높은 훈장인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 줄여서 VC)이었다. 평생 한 번도 받기 힘든 그 훈장을 찰스 어팸은 두 번이나 가슴에 달았다. 영연방 출신 군인 가운데서는 처음(지금까지도 이어진다)이자 마지막이다.
두 번째 훈장을 수여한 조지 6세(King George VI)가 뉴질랜드 부대 총책임자인 키펜버거 소장(Major-General Kippenberger)에게 물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영웅입니까?”
키펜버거는 이렇게 말했다.
“두 번이 아니라 몇 차례도 더 받을 수 있는 참 군인입니다.”
찰스 어팸 본인은 겸손 그 자체였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는 불도그 같이 날뛰었지만 삶의 현장에서는 소박한 시골사람처럼 지냈다. 훈장 소식을 들은 그는 “상을 받을 수 있어 자랑스럽지만 나보다 더 많은 군인이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도 이 상을 받을 자격이 넉넉히 있다”고 말했다.
농장 선물 거절, 장학금으로 내놔
1945년 9월 찰스 어팸은 뉴질랜드로 돌아왔다. 고국은 그를 ‘2차 세계대전의 영웅’으로 반겨주었다. 수십 차례 강연을 마친 뒤 그는 다시 평범한 삶을 찾았다.
캔터베리 주민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아 찰스 어팸에게 농장을 선물로 사 주려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그 돈은 “전쟁에 참가한 군인 아들딸들의 장학금으로 써야 한다"고 했다.
몸을 바쳐야 할 전쟁터에서는 누구보다 용감했지만 희로애락을 나누는 일상생활에서는 겸손하고 배려 깊었던 찰스 어팸. 지금도 많은 키위는 그를 전쟁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1994년 11월 22일 여든여섯 세월을 뒤로하고 이 땅을 떠난 찰스 어팸은 ‘전쟁 영웅’이 아닌, 평범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