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63) 종려나무 가지를 들라! <요한복음 12:12~19>
오늘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는 것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이번 한 주간은 고난 주간으로 지키게 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환영하였기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럼 왜 수많은 나무들 중에, 굳이 종려나무 가지였을까요? 종려나무는 생명력이 강해서, 심지어 나무를 다 자르고 그루터기를 아예 불에 태워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싹이 난다고 합니다. 게다가 종려나무는 엄청나게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종려나무는 풍요의 상징이요, 부활과 생명, 더불어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사실 종려나무는 키가 30미터씩 자라기 때문에 그냥 이렇게 쉽게 그 가지를 꺾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게 다 준비된 상황인 것입니다. 본문 12절과 13절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서, 종려나무를 가지고 맞으러 나갔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오늘 예수님을 향한 환영이 그냥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백성들 나름대로 다들 준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종려주일, 우리의 손에도 종려나무 가지가 들려져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어야 할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 믿음의 결단을 세우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내 진실된 믿음의 고백이 담겨져야 합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을 향한 백성들의 외침을 종합하여 보면, 저들의 기대가 무엇인지를 잘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가 되어 주옵소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메시야가 되어 주셔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옵소서.” “호산나-주여 구하옵나니 지금 구원하소서”. 여기서 중요한 말이 무엇인가요? “지금!”입니다. “지금 당장 구원하소서.”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상은 혁명적인 지도자입니다. 이렇게 보면, 저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어서 진실된 믿음의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다기보다는 자신들의 소원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의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은 어떠한지요?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면서, 입술로는 “나의 주님!”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전히 내가 주인노릇하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우리가 주를 향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 앞에 자녀처럼 순종해야 합니다.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면, 그 앞에 정말 종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나의 왕이시여!” 고백하면 그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내 진실된 믿음의 고백은 입으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내 행동으로, 내 삶으로 해야 합니다. 내 진실된 믿음의 고백. 뭐 그렇게 거창하게, 대단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신앙인이 이래야지!” 그럼 그렇게 살면 됩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이 있어야지.” 그럼 그렇게 되도록 내가 먼저 애쓰면 됩니다. 내 가슴으로, 내 입술로, 무엇보다 내 삶으로, 진실된 믿음의 고백을 담아,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나의 영적인 깨달음이 담겨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시는 길에,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나귀를 타셨을까요? 일차적인 이유는 스가랴에 담긴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럼 왜 스가랴에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실 것을 예언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신 이유는 나귀가 평화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왕들도 평화 시에는 나귀를 탔습니다. 반면에 말은 전쟁을 상징합니다. 아마도 유대인들이 실제로 바랬던 메시야상에 어울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말을 타신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앞서 스가랴 9장 9절의 메시야께서 나귀를 타신다는 말씀에 이어 10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메시야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말을 끊으십니다. 평화로 전쟁을 그치게 하심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왜 저들은 깨닫지를 못하나요? 분명히 성경에는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메시야를 약속하셨는데, 전쟁을 끊으시고 평화를 이루실 메시야를 약속하셨는데, 왜 저들은 말을 타고 정복자로 오실 메시야만을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영적인 깨달음 없이 내 방식대로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문 16절에도 보면, 제자들도 당시에는 깨닫지를 못합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아! 예수님께서 그래서 나귀를 타신 거구나.” “스가랴의 말씀이 예수님의 이 모습을 예언한 것이구나.” 깨달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수많은 무리들, 종려나무 가지 암만 들고 흔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 안에 영적인 깨달음이 없는데, 아무리 “호산나 호산나!” 외친다고 내게 구원이 임합니까? 깨닫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에게 영생이 주어졌음이 깨달아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심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음이, 성령께서 나의 삶을 인도하심이 깨달아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영적인 깨달음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끝까지 따라가는 나의 순종이 담겨져야 합니다.
본문 12절에 말씀하죠. “큰 무리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앞에 나갔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면서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19절에 보면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미던 바리새인들이 말합니다.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온 세상이 예수님을 따른다고 표현할 정도로 대단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향한 이러한 열렬한 환영과,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여!”라는 찬송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라는 함성으로 바뀌는데는 불과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가 어디서 나오나요? “정말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와 그 주변에 그냥 몰려든 무리와의 차이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스스로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 어떠한 신앙의 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가? 어떤 모습으로 신앙의 걸음을 걷고 있는가?” 우리의 신앙의 걸음 속에서 “일희일비”하면 안됩니다. 히브리서 12장에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왜 우리가 예수님을 바라봐야 합니까?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 우리 주변 환경만을 바라보면, 결국 주저 앉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를 앞두시고, 말씀하십니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히브리서 3장 14절에도 말씀합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또한 요한계시록 2장 26절에도 말씀합니다.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손에 종려나무가지를 들었으면, 끝까지 가야 합니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끝까지 변함없는 신앙의 고백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끝까지 변함없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끝까지 오직 주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결단으로, 끝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해, 이 고난의 절기를 지나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소유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