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Z Great Walks(뉴질랜드의 위대한 올레길) 여행기 케플러 트랙 1(Kepler Track)
D.O.C가 온전히 등산 애호가만을 위해 만든 길…
“밀퍼드 트랙이나 루트번 트랙보다 더 황홀하다”
남섬 퀸스타운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171km)에 있는 테 아나우(Te Anau)는 등산 애호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평범한 여행자들에게는 뉴질랜드 최고의 관광지라고 할 수 있는 밀퍼드 사운드(Milford Sound)로 가는 관문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나 같이 배낭 하나 짊어지고 문명 세계를 뒤로 한 채 깊은 산 속에서 며칠이라도 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경건한 마음으로 등산화 끈을 조여 매게 하는 성지(聖地)이다.
‘절대고독은 절대공간에서….’
대자연의 위대함에 인간은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들판만 넘으면 첫날 목적지인 럭스모어 산장에 다다른다.
케플러 트랙 첫 쉼터인 브로드 만(Brod Bay), 테 아나우 호수에 붙어 있다.
석회암 절벽을 따라 하루 등산객(day tramper)이 무리를 이뤄 걷고 있다.
럭스모어 산장. 쉰 명에 가까운 등산객들의 소중한 하루 안식처다.
테 아나우, 케플러 트랙 등 세 올레길 출발지
테 아나우 호수(Lake Te Anau)는 북섬에 있는 서울 넓이(605Km2)와 비슷한 타우포 호수(616Km2)에 이어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344Km2)이다. 마오리 말로 ‘소용돌이치는 물 동굴’이라는 뜻을 지닌 이 호수는 남북 65Km 길이로 길게 뻗어 있다. ‘빙하로 만들어진 좁고 깊은 만(灣)’을 의미하는 피요로드(Fiord)를 오롯이 품고 있는 테 아나우 호수는 뉴질랜드 피요로드랜드국립공원(Fiordland National Park, 1952년 개원. 면적은 12,607Km2)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테 아나우 호수를 장황하게 언급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곳이 뉴질랜드가 자랑하는 ‘위대한 올레길’(NZ Great Walks) 열 곳 중 세 곳인 케플러 트랙(Kepler Track), 밀퍼드 트랙(Milford Track), 루트번 트랙(Routeburn Track)의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인 케플러 등산 여행기를 시작한다.
케플러 트랙 64km 구간은 케플러 컨트롤 게이츠(Kepler Control Gates)에서 출발한다. 테 아나우 중심지에서 걸어서 50분, 4km 떨어진 곳이다. 이 게이츠는 테 아나우 호숫물을 사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친환경 수력발전소의 한 시설물이다. 케플러 트랙은 순환(circuit) 구간으로 짜여 있다. 대부분의 등산객은 3박 4일 동안 럭스모어 산장(Luxmore Hut)-이리스 번 산장(Iris Burn Hut)-모투라우 산장(Moturau Hut)을 지나는 코스를 탄다. 뉴질랜드 보존부(D.O.C)도 그걸 추천한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보존부의 안내를 따르는 게 좋다. 경험자의 조언이다.
럭스모어 산장까지 시속 2km 험난한 구간
컨트롤 게이트 주차장을 벗어나면 곧바로 숲길이 나온다. 케플러 트랙에 들어선 것이다. 여기서부터 첫 휴식처인 브로드 만(Brod Bay)까지는 5.6.km, 1시간 30분 거리다. 너도밤나무(beech)와 나한송나무(podocarp)가 울창한 이 길은 동네 숲길처럼 아기자기하다. 몸풀기 걷기로 딱 좋은 구간이다. 일부 등산객은 이 구간을 거치치 않고 브로드 만에서 케플러 트랙을 시작한다. 테 아나우 부두에서 이곳까지 하루 등산객(day tramper)을 배로 태워 나르기도 한다. 브로드 만에는 텐트촌도 마련되어 있다. 테 아나우 호수를 즐기기에는 최고다.
브로드 만을 지나면 곧바로 오르막 숲길이 나타난다. 200m 지역에서 1,000m 지역까지 올라가야 하는 험난한 코스다. 첫날 숙소인 럭스모어 산장까지는 8.2km. 그리 길지 않은 구간인데도 안내판에는 4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쓰여 있다. 1km를 시속 2km로 걸어야 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안내 책자나 경험자들은 이 구간을 가장 힘든 구간이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올라만 가야 하는 길고 지루한 산길이다. 하지만 등산객들은 이 고비만 넘으면 환상의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 것을 잘 알기에 땀을 흘려가며 한 발 두 발 앞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다.
석회암 절벽 지나면 첫날 9부 능선은 넘어
3시간 정도 넘게 걸으면 오른쪽으로 큰 바위 무더기가 나온다. 석회암 절벽(Limestone Bluffs)이다. 땀을 식히고 싶은 등산객이라면 다들 사진 한두 장은 찍고 넘어가는 첫날 기념지이기도 하다. 힘든 길의 9부 능선은 넘었다는 뜻이다. 물론 10% 어려움은 더 남았지만(90도에 가까운 계단 길을 한참 올라가야 한다.) 그래도 첫날 무사히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자신이 대단하다고 자부해도 된다.
계단 길이 끝나면 얼마 안 있어 풀숲(tussocks) 더미로 가득 찬 대평야가 눈에 뜨인다. 나도 모르게 맘도 몸도 한꺼번에 시원해지는 느낌이다. 내 위로 하늘이, 내 아래로 호수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 즐거움은 다음 날 내내 이어지지만, 지상 1천m 산 위에서 내려본 테 아나우 호수의 첫인상은 황홀하기 그지없다. 왜 많은 등산객이 밀퍼드 트랙이나 루트번 트랙보다 케플러 트랙이 더 좋다고 하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어쩌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한 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한 것을 실제로 체감할 수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신이 빚은 자연의 경이로움을 본 인간들(등산객)은 그저 경탄 외에는 따로 할 게 없다. 나 역시 그랬다. 산행 첫날의 노고는 조금은 거친 산들바람에 실려 나가기도 했지만 이 멋진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내가 스스로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절대고독은 절대공간에서 나온다” 느껴
럭스모어 산장까지 이어지는 산 위 평야 길은 한 시간 가깝게 펼쳐진다. 사방이 탁 트여 있어 두 눈도 시원하다. 그 사이 어느 한 곳에 무거운 배낭 짐을 내려놓고 쉬더라도 좋을 정도로 환상적인 길이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바람이 점점 거세어져 가는 탓에 내 몸이 뒤로 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역풍을 이기고 앞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영국 작가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의 무대가 이곳 같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늘 그렇듯이 이번 산행도 나 홀로였다. 평소 걸음이 늦은 내가 다른 등산객보다 이 구간을 앞서갈 수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오후 다섯 시를 훌쩍 넘어 있었다. 뉴질랜드의 여름 기운이 조금은 남아 있는 2월 중순 어느 날이었지만 구름이 끼어 있고 높은 산 위라 그랬는지 스산한 기운마저 들었다.
하지만 “절대고독은 절대공간에서 나온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사람은 죽어 하늘의 별이 될 수도 있겠지만 또 황량한 들의 풀꽃도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케플러산이 내게 말해주었다.
지친 여행자에게 내가 가는 길이 맞는다고 알려주는 것은 중간중간 세워져 있는 주황 색깔의 삼각형 안내판뿐이었다. 수도승처럼 묵묵히 앞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두툼한 옷 속까지 파고드는 강풍을 품에 안고 한 발 두 발 힘들게 내디뎠다. 그러면서 이 위대한 길(Great Walk)을 만든 위대한 사람들(Great People)을 생각했다.
1988년 트레킹.산악 마라톤 전용으로 문 열어
케플러 트랙의 원래 목적은 피요로드랜드국립공원 안에 있는 밀퍼드 트랙과 루트번 트랙의 등산객을 분산 배치(?)하기 위해서였다.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이 두 곳을 찾는 국내외 방문객들의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뜻이었다. 온전히 올레길 걷기만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트레킹 코스가 바로 케플러 트랙이다. 뉴질랜드 D.O.C는 1985년 케플러 트랙 공사에 착수했다. 뉴질랜드 최초의 국립 공원인 통가리로국립공원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사업 중 하나였다.
첫 삽을 뜬 지 3년 뒤인 1988년 케플러 트랙은 뉴질랜드 등산 애호가들에게 개방됐다. 높은 산등성이에 1m도 채 안 되는 아슬아슬한 산길을 만들고 깊고 얇은 강물 위에 크고 작은 든든한 다리를 놓아 등산객들의 발길을 편하게 해주었다는 사실은 이 트랙을 다 끝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D.O.C 직원과 자원봉사자들은 사람 발이 닿기도 힘든 이 공간에 작은 불도저와 최소한의 공구만 사용해 64km, 150리가 넘는 3박 4일 구간의 멋진 산길을 창조해 냈다. ‘위대한 길’을 만든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다른 위대한 올레길은 대부분 금이나 옥(玉, pounamu: greenstone)을 찾기 위해 나선 마오리와 초기 유럽계 정착민들이 사용한 길을 개조한 길이라면 케플러 트랙은 온전히 등산 애호가들을 위해 만든 길이다.
‘이제 앞길은 더 멋질 거예요’
다시 여행기 본론으로.
산길 평야를 바람과 싸우며 한 시간 정도 걷자 저 멀리 산장이 보였다. 산장에서 밤을 지낸 경험이 있는 많은 등산객이 이구동성으로 뉴질랜드 산장 중 톱 텐(Top 10)에 든다는 럭스모어 산장이다. 산장 시설 그 자체보다 산장 아래로 보이는 풍경이 ‘또 다른 환상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하루 몫의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산장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기 시작한 산장에는 이미 쉰 명에 가까운 선배 등산객들이 둥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힘이 다 빠진 추레한 후배 등산객인 나는 매트리스를 펴고 지친 육신을 눕혔다. 눈앞 창 아래 화폭처럼 펼쳐진 테 아나우 호수가 손을 흔들며 이방인을 반겼다.
‘날 보러 오느라 정말 수고했어요. 이제 앞길은 더 멋질 거예요.’
글과 사진_박성기
<다음 호에 이어집니다.>
박성기
1995년 3월 뉴질랜드에 이민 왔다. 그동안 ‘뉴질랜드타임즈’, ‘크리스천라이프’, ‘일요시사’ 등 여러 교민 신문에 글을 써 왔다. 1990년 20대 후반 배낭 하나 메고 1년 동안 네팔, 인도, 케냐 등 40여 나라를 여행했다. 월간중앙 논픽션 우수상(1993년)과 재외동포문학상(수필, 2013년) 대상을 받았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젊은 33인 나의 일, 나의 꿈》, 《공씨책방을 추억함》 등 세 권의 책을 펴냈다.
2019년 10월 통가리로 노던 서킷(Tongariro Northern Circuit)을 시작으로 ‘뉴질랜드 위대한 올레길 열 곳’(NZ Great Walks 10) 대장정에 나섰다. 코로나19로 중간에 발길을 멈춰야 했지만 마침내 지난 3월 중순 왕가누이 저니(Whanganui Journey)를 마지막으로 열 곳을 완주했다. 앞으로 뉴질랜드 역사 및 여행 관련 책을 집중적으로 쓸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