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8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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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3월 29일~1974년 8월 12일>



2차 세계대전 발판 삼아 '건설업계 거인' 으로 커  


정치 지도자들도 그를 좋아했다. 

때로는 돈이 안 되더라도 나라에서 부탁한다면 기꺼이 해주는 

큰 장사꾼이었다. 정부가 발주한 공공 주택 수백 채를 지었다. 

건축에 들어간 돈이 현금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큰 장사꾼에게 적지 않은 경제 혜택이 돌아갔다



뉴질랜드는 오늘도 ‘공사 중’이다. 쉴 새 없이 길을 깔고, 다리를 놓고, 건물을 짓고 있다. 없던 길이 생기고, 공간과 공간이 이어지고, 최첨단 건물들이 키위들 눈을 끌고…. 그렇게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역사로 발전해 가고 있다. 그 건설 역사를 책임지고 있는 곳 가운데 하나가 플레처 그룹(Fletcher Group)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현대’하면 먼저 떠오는 것이 건설사업이듯, 키위들에게 ‘플레처 그룹’은 ‘뉴질랜드의 오늘’을 만들어낸 대표 건설 회사다. 무엇보다 역사 발전을 눈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만 믿을 수 있다’고 한다면 플레처 그룹 창업자 제임스 플레처 만큼 뉴질랜드 역사 발전에 두드러지게 공을 세운 사람도 없다.



대패, 끌 같은 연장 몇 개 들고 더니든으로

 제임스 플레처는 1886년 3월 29일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다. 1908년 캐나다 이민 붐이 한창이었지만 제임스 플레처는 뉴질랜드를 골랐다. 어쩌면 고른 것이 아니라 ‘대타’였는지도 모른다. 때가 맞지 않았다.

 

제임스 플레처가 믿었던 것은 막노동 판에서 힘들게 버티며 배운 5대째 대물림 된 목공 기술뿐이었다. 이민 보따리에는 대패, 끌 같은 집 지을 때 필요한 연장 몇 개가 들어 있었다.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나 열세 형제와 티격태격 싸우면서 자랐지만 천성이 밝고 쾌활했던 제임스 플레처는 뉴질랜드를 금이 쏟아져 나올 ‘기회의 땅’으로 보았다.  

 

더니든(Dunedin, 남섬 남쪽 끝에 있는 역사가 깊은 도시)에 도착한 제임스 플레처는 영국에서 온 앨버트 모리스(Albert Morris)와 의기투합, 곧바로 건축 일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유로운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며 사업을 벌였다. 첫 작품으로 정부에서 부탁받은 공공주택 100채를 지었다.


 더니든에서는 만만한 적수가 별로 없던 그 시절, 킬다 타운홀(St. Kilda Town Hall)과 낙스 칼리지(Knox College, 더니든에 있는 장로교 신학대학)를 건축하면서 이름값을 높여 나갔다. 20대 플레처는 그렇게 하루하루 더니든의 역사를 만들어냈다.

 

잘 나가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어려움이 닥쳐왔다. 그가 지은 더니든 수영장에서 많은 물이 샜다. 설상가상으로 동업자 앨버트 모리스와 갈라섰다. 어렵다고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제임스 플레처는 형제들(윌리엄, 앤드류, 존, William, Andrew, John)을 회사에 들어오게 했다. 회사 이름을 플레처 브라더스(Flectcher Brothers)라고 정한 뒤 문제를 정면 돌파해 회사를 제대로 돌려놓았다. 나아가 남섬 끝 인버카길(Invercargill)에 지사를 세웠다.

 


목재 회사 인수, 외화벌이 톡톡히 해

 1911년 제임스 플레처는 로티 캐머런(Lottie Cameron)과 결혼했다. 5년 뒤 북섬까지 진출해 오클랜드 마켓(Auckland Market)을 지었으며 웰링턴에도 큰 건물을 올렸다. 1920년이 되자 뉴질랜드에는 다툴 수 있는 회사가 없을 만큼 잘 나갔다.


 제임스 플레처는 건설 관련 사업체를 하나둘 사들였다. 배관 설비, 벽돌 제조, 대리석과 채석 사업장이 손안에 들어왔다. 플레처 컨스트럭션(Fletcher Construction)이라는 회사를 세웠다. 

 

인수합병 시장에서 눈에 띄는 분야는 목재사업이었다. 그때만 해도 뉴질랜드산 목재는 해외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제임스 플레처가 손을 대자마자 목재사업은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질 좋은 뉴질랜드산 목재가 외국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제임스 플레처는 기술 개발에 욕심이 많았다. 관련 서적을 읽고 신공법을 건설 현장에 적용했다. 한창 사업 맛에 빠져들었던 30대 시절이었다. 너도나도 힘들다고 하던 경제공황 때에도 어려운 줄을 몰랐다.

 

1931년 혹스 베이(네이피어 지역)에 대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파괴된 도시를 누군가 다시 일으켜 세워야 했다. 당연히 제임스 플레처 차지였다. 국가로부터 ‘도시 재건’ 사명을 받고 새 도시(기즈번, Gisborne, 북섬 동남쪽에 있는 도시)를 만들어냈다.

 

플레처는 오클랜드대학 예술학부 건물(Auckland University College of Arts), 통가리로 샤토 호텔(Chateau Tongariro), 오클랜드 시빅 시어터(Auckland Civic Theatre), 웰링턴기차역(Wellington Railway Station), 도미니언박물관(Dominion Museum)을 건축했다. 내로라하는 뉴질랜드 건물들은 대부분 그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왔다.

 


나라가 부르면 사심 없이 언제든 도와

 제임스 플레처 주위는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정치 지도자들도 그를 좋아했다. 때로는 돈이 안 되더라도 나라에서 부탁한다면 기꺼이 해주는 ‘큰 장사꾼’이었다. 정부가 발주한 공공 주택 수백 채를 지었다. 건축에 들어간 돈이 현금이 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은 큰 장사꾼에게 적지 않은 경제 혜택이 돌아갔다.

 

1940년 회사 이름을 플레처 홀딩스(Fletcher Holdings)로 바꿨다. 제임스 플레처는 정부 사업을 많이 맡았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나라 안팎으로 건설과 중공업 관련 일이 밀려들었다. 정부는 플레처를 믿었고 그 역시 나라가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었다.

 

제임스 플레처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약속한 기간에 공사를 끝낸다는 점이었다. 미국 해군 2만 명이 머무를 캠프를 6주 만에 만들었다. 크고 작은 122개 건물로 된 오클랜드 병원(콘월 파크 Cornwall Park 안)을 16주에 마쳤다. 제임스 플레처는 ‘약속’ 그 자체였다.

 


취미로 경마용 말 길러내는 일 즐겨

 건축 외에 플레처가 즐겼던 취미는 경마용 말을 길러내는 일이었다. 명마로 키워낸 경주마가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기쁨은 그가 그렸던 수많은 설계도 속 도면을 현실로 되살려내 사람들을 기쁘게 했을 때 느끼던 보람과 같은 것이었다. 1952년 멜버른 컵 우승마였던 달래이(Dalray)는 그가 키운 말 가운데 하나였다.

 

그가 한평생 사업을 하면서 부(富)를 얼마나 일궈냈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임스 플레처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플레처 가문의 영광은 건설업계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임스 플레처는 1974년 8월 12일 오클랜드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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