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를 위한 만남과 감사의 글쓰기『Heavens 지금 여기』백동흠,
1.
문학이 창작되는 저변에는 잘 사는 방법에 대한 자기검열이 깔려있다. 특히나 수필은 사실을 매만지다보니 그 검열이 한층 엄격하고 현실적이라야 한다. 그래야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다. 교묘한 자기자랑이나 끝없이 늘어지는 부정적 사유와 편견을 담은 수필은 그것이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수필’이라서 더 불편한 법이다. 잘 만든 한 권의 수필집에는 작가가 오랜 시간 갈아 놓은 검열의 잣대가 있다.
그 잣대는 작가에게는 매섭지만 독자의 책 읽는 시간을 편안하게 만든다. 마치 노련한 운전사가 핸들을 잡은 택시의 뒷자리에 앉았을 때처럼. 도시의 도로는 어디나 할 것 없이 복잡하다. 북반구의 대도시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반구의 나라를 떠올릴 때, 드넓은 목초지에서 양떼와 캥거루와 에뮤가 한가로이 서성이고 있는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릴지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백동흠의 수필집 'Heavens 지금 여기'를 받아들었을 때 좀체 그려지지 않는 뉴질랜드와 그곳의 택시, 그리고 제임스나 폴이 아닌 백동흠이라는 작가의 이름 사이에서 첫 장을 펼쳐 읽기가 머뭇거려졌는지도 모르겠다. 몇 천 킬로미터 쯤 떨어진 지정학적 거리감에서 오는 난색만은 아니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가 아니던가? 그러니까 필자의 머뭇거림은 고국을 떠나 완전히 다른 남방의 삶을 선택한 작가의 사유가 아득했기 때문이었다.
삶이 고단하고 지칠 때, 혹은 늘 만나는 일상이 부조리하고 느낄 때, 믿었던 사람과 조직과 국가가 나를 배신하고 있다고 생각될 때, 우리는 버릇처럼 함부로 당장 내가 살던 터전을 등져버리겠노라고 내뱉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책임지지 못 할 투정이지 그것을 실현시킬 용기도 여력도 사실 우리에게는 없다. 그래서 백동흠의 수필을 읽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미지의 세계를 더듬고 다시 그려보는 재미난 공정이다.
2.
아주 절묘하게 기울어진 지구의 축이 만들어낸 당연한 이치겠지만 남반구의 8월은 겨울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북방의 사고일 뿐 ‘지금 여기’에서 느끼는 계절적 체감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 역시 택시 운전을 하면서도 사람 쬐는 시간이 좋은 에너지를 불러일으킨다. 누가 말하지 않아도 손짓하지 않아도 좋은 풍경을 보면, 잠시 주춤하고 응시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편안한 기운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생각이 넘나드는 시간은 평화롭다. 파도가 해변을 따라 밀려왔다. 스러지듯 생각이 밀려가고 밀려온다. 나는 몰라도 누군가는 나를 보고 위안을 받을지도 모른다. 나도 몰래 그림이 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계가 겨울 속으로 기울어간다. 동그랗게 말린 플라타너스 이파리가 땅바닥에 스르륵 뒹군다.
뉴질랜드의 8월. 낮이 짧고 밤이 긴 겨울이다.
<사람만 한 난로가 없다> 중에서
작가는 8월의 겨울과 같은 (한국의 독자들이 느끼는) 이국적 배경 속에 ‘만남과 감사’라는 따스한 시각을 심고 그 축의 반경을 조금씩 넘나드는 작품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작가의 수필 세계가 가지고 있는 방향성의 팔 할을 차지할 현실적 배경, 그러니까 이동을 업(業)으로 삼고 있는 작가의 직업이 ‘만남과 감사’라는 사유의 깊이를 극도로 끌어올려 놓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의 지문은 작가의 수필관 전반을 아우르는 것으로 읽힌다.
나도 모르게 이루어진 만남 속에서 나와 그 누군가는 서로에게 어떤 의미가 되고, 그 삶의 일상성이 주는 감사의 영역에서 작가는 수필을 쓰고 있다. 어둑한 서재의 한 구석에서 작은 단상에 의지해 세상사를 다 깨우친 듯 정리되지 않은 장광설을 쏟아 놓는 수필보다 멀고 먼 도시의 어느 도로를 누비며 만난 사람을 통해 지어진 현장의 글이 겨울이라 더 소중하게 느껴지는 온기를 품은 듯하다는 것은 비단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수필은 사실을 매만져 탄생되는 문학이다. 그런 특성이 수필의 장르적 한계를 그어 놓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사실이 주는 현장감으로 인해 독자는 끊임없이 작가에게 질문을 던져 볼 수 있다. 노련하고 좋은 작가라면 독자의 이 질문들을 미리 파악해 자신의 작품 속 이곳저곳에 그 해답을 배치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 현장성의 의미에서 볼 때 『Heavens 지금 여기』는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좋은 조건을 갖춘 수필집이다. 일단 이 수필집에 수록된 작품은 ‘먼 곳의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있어 지정학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 ‘멀다’는 것은 이야기의 신비감이나 흥미를 높이는 데 매우 좋은 역할을 차지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정보’를 얻기 위해 수필을 읽지 않는다. 검색과 독서는 읽는다는 행위만 같을 뿐 그 목적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예를 들어보자. 이 일은 오클랜드 근교 ‘힐스브로우 레스트 홈’이라는 요양원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할아버지 보행기를 끌고 사무실로 사라지는 직원 뒷모습을 바라보며, 정신이 나간 채로 우두커니 서 있다. 한참 후, 세상이 가물가물 눈에 들어온다. 십수 년째 택시 운전을 해오던 중, 오늘은 생의 마지막 손님을 태워다 준 날이다. 그런 손님치고는 너무도 특별한 분이다. 한국전쟁 참전 용사 할아버지…. 보행기 바구니 속의 손지갑과 열쇠고리 그리고 약봉지와 성경책이 눈에 아른거린다. 돌아서는 발길 너머, 저녁노을이 홍시 단내를 저어 올리며 붉게 물들어가고 있다.
<노을> 중에서
근래에 생산되는 대부분의 수필은 관조의 차원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드물다. 현대 수필이 말하고자 하는 사실에 관한 사유는 작가의 이야기 욕망에서 시작된다. 말하자면 수필이 사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서사문학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야기의 욕망이 사실에 겹쳐지는 과정은 허구가 허용되지 않는 수필의 장르적 특성으로 인해 인과관계가 단절된 상태로 작품에 나타나게 된다.
즉 작가의 일상에서 우연에 기인한 사건이 작가의 기억 속 이야기를 불러오는 형태로 발현되는 것이다. 어쩌면 수필에서의 우연은 소설에서의 허구적 플롯을 대신하고 있는 장치일지 모른다. 소설의 인과관계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만들어지는 것은 허구이기 때문이다. 반면 수필의 경우는 어떠한가?
우연에 기인하지 않는다면 수필의 이야기성은 형성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수필에 소설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작가의 이야기 욕망이 인과관계가 부합하는 사건과 결합해야 한다고 강요한다면 대부분의 이야기는 사장(死藏)되고야 말 것이다.
일상의 어느 인상적인 순간을 붙잡고 그것을 하나의 사유로 이끌어내어, 글이 가진 엄격함을 지키면서, 결국엔 미학적 읽을거리로 만드는 일은 수필가에게 반드시 필요한 능력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을>은 탁월한 이야기성을 가진 작품이다. 일상 속에서 의미를 부여할 만한 어떤 일을 접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작가는 시간적으로는 멀지만 어떤 특별한 인연을 가진 한 인물을 만난다.
여기서 수필은 이미 잘 설치된 무대를 구축하게 된다. 또한 독자는 잘 짜여진 작품의 구조로 인해 독서의 집중력을 배가할 수 있다. 수필 속 그 만남은 비록 일회적이지만 그래서 더 먹먹한 극적 여운을 남긴다.
이민자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젊은 날의 한때를 바쳤던 벽안의 한 노인이 그 마지막 여정을 작가의 택시 안에서 마무리한다. 작품 속에서 작가가 말하지는 않지만 이 작품의 전반에 깔린 작가의 태도는 감사함이다. 말하자면 인물의 내면이 조금은 안타까운 일상의 장면으로 그려지는 형상화에 도달한 것이다.
3.
오래 전, 작가는 하얀 찔레꽃잎이 날리던 마당의 한 장면을 아직도 잊지 못 하고 있다. 그날 작가는 어린 누이를 잃었고 작가의 아버지는 딸을 담은 작은 항아리를 지게에 지고 홀로 황토산으로 향했다. 비록 그날 마당을 나서는 아버지의 표정을 어린 아들이 보지는 못 했지만 그 발걸음이 ‘구름처럼’ 느렸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세월이 흘러 작가는 아버지의 어깨에 올려진 그 무게감을 충분히 아는 ‘아버지’가 되었다.
“나다!”
아버지의 존재감이 확 느껴지는 한마디였다. 듣는 순간 뭔가 뭉클하게 올라왔다. 눈물이었다. 아버지가 장독을 지고 작대기 쥔 손등에 떨어뜨렸던 눈물 같았다. 내 콧잔등 위로 흘러내렸다. 부러 선글라스로 가렸다. 손님한테 애써 태연한 척하며 운전했다.
아버지는 예전에 시골에서 지게 짐을 지며 생계를 이어갔다. 나는 이민 와서 택시 운전하는 일로 살고 있다. 나도 모르게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따라가고 있다. 어려운 일이 있어도 다시 힘을 받아 일어설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지게 짐에서 오는 위안 때문이다.
<작은 장독과 아버지의 지게> 중에서
이제는 아련해진 사람과의 추억은 더 큰 울림을 준다. 특히나 그것이 ‘가족’이라는 층위 속에서 만들어진다면 그 아프고 따듯한 서사성이 무한대로 뻗어날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수필집 『Heavens 지금 여기』는 가족과 노인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
작가가 글을 지어내는 사유 속에 그들을 오래 담아두고 있었다는 방증일 것이다. 작품 속에서 작가는 가족을 추억하고 또 노인들을 만나면서, 주로 배우고 늘 그 배움에 감사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는 만남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자신의 삶과 역사에 대해 고민하려고 발 벗고 나선 이로 보인다. 그것은 물론 글을 쓰려는 많은 이들의 특수한 능력이다.
자의든 타의든 글을 써야하는 그 본능의 수행과정이 가끔은 얼마나 지난(至難)한 일이며, 또 한편으로는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리운 나의 부모를 만나지 못하고 타국의 택시 안에서 소리죽여 눈물을 감추어야 하는 그리고 그 고통스러운 일련의 과정을 글의 전면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전혀 고통스럽지 않은 어조로 말하는 일에 착수할 때 비로소 좋은 수필은 만들어질 것이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우리 삶의 이면에 내재하고 있는 내밀한 의미를 포착하는 일, 또한 삶의 한 단면을 말하고 있지만 삶의 전체적 의미로 확산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우리이기 때문에 작가의 글이 먼 곳의 이야기로서 더 가치 있다고 여겨진다.
<Heavens 지금 여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가의 담담한 인사가 더 가슴 뭉클하게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가진 감사함의 모든 것을 내포하는 어조가 양껏 담겨 있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어머니는 Heavens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지금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신다.
‘어머니, 이제 편히 쉬세요. 아버지와 함께 하늘나라에 잘 계세요.’
<Heavens 지금 여기> 중에서
4.
수필을 포함한 모든 서사장르가 미학적 전달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이다. 정서가 어떻게 드러나느냐에 따라 작품의 의미는 새로워진다.
수필에서 대상만을 제시하는 글은 감상의 폭이 건조해지기 마련이고, 정서만을 강조하는 글 역시 극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려 읽는 재미를 깎아내리기 일쑤다.
가끔 평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수필 읽기를 할 때 스스로에게 묻고는 한다. 왜 수필을 읽는가? 적어도 우리가 수필집의 책장을 펼치면서 지식이나 정보를 얻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혹은 막상 작품을 행간을 들여다보았더니 어쭙지않은 자신만의 논리를 내세운 철학이나 이념에 동조하라는 격문과도 같은 수필이라면 그 불편함은 곧 독서를 그만두게 만들 것이다.
수필에서는 타인의 일상적 정서가 작든 크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만 하면 된다. 세상을 바꾸거나 뒤엎는 큰 파도와 같은 진실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머리칼을 살짝 흔들 만큼의 미풍일지라도 오늘을 잘 살게 해주는 위로와도 같은 따스함이나 시원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필가에게 있어 ‘조금 덜 말할 줄 아는 능력’은 필수적이며 예술적인 것이다.
산길을 오르다 아내의 시선이 길가 숲에 사로잡힌다. 가시덤불 속에 꽤 굵고 튼실한 녀석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외국에 살면서 이렇게 낯익은 모습을 모니 고향 정취가 물씬 느껴진다. 고국과 계절이 반대인 뉴질랜드의 늦은 봄 11월, 고사리들이 제출을 만난 모양이다.
하루 일을 마칠 무렵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핸들이 가볍다. 동네 어귀에 다다르자 도로 가운데 한 줄로 서 있는 야자나무에서 남국의 정취가 느껴진다. 석양빛을 받아 평화스럽다. 저녁상을 물린 후 나만의 자유 시간을 갖는다. 몸과 마음이 휴식 상태로 들어간다.
밖으로 나가 마루 데크에서 서서 나무고사리들이 우거진 곳을 내려다본다. 그 위에 새 한 마리가 먼저 와서 쉬고 있다. 저녁노을이 고사리나무 뒤로 붉게 물들어간다.
<실버 펀과 코루>의 도입부와 결말부 중에서
소설도 마찬가지겠지만 수필의 문장은 크게 서사, 묘사, 대화 등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에서 문장이 주는 감동은 묘사의 수준에서 결정되는 경우가 잦다. 백동흠 수필의 대부분은 묘사로 시작하고 그 속에 서사를 고이게 한 다음 묘사로 끝을 낸다. 물론 이러한 구조가 작가의 독특한 창작 실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묘사가 이끄는 능력과 남기는 흔적이 만만하지 않았다.
작가는 어느 산길을 걷다가 고사리 군락을 발견한다. 작가에게 포착된 이 식물은 이내 한국의 봄나물이 되어 유년시절의 추억을 불러왔고 이민자로서의 고단한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고는 무언가 더 할 말이 있을 듯도 한데 해가 지는 저녁 무렵의 동네를 묘사하면서 작품을 마무리한다. 필자는 그런 끝내기가 무언가 작가의 내면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여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독자와 작가의 소통이라고 할까?
특히나 작가의 수필세계가 가지는 장점, 그러니까 이국이라는 공간적 장치가 이 묘사의 힘을 태생적으로 강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앞서 말한 필수적이며 예술적 능력 즉 어느 순간 서사를 향한 입을 다물고 하나의 장면을 툭하고 독자에게 던져주는 능력이 탁월했다.
그 능력으로 인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오클랜드의 맑은 하늘이 그려졌고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달리는 (왠지 녹색일 것 같은) 택시의 안락함을 손쉽게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수필적 자장(磁場)을 활짝 펼쳐 놓은 채 능숙한 솜씨로 손님을 행선지로 모시는 작가의 다정한 모습도 너무나 보고 싶었다.
독자에게 무언가 그리고 느끼고 바라게 하는 능력을 갖춘 작가는 그 사실을 인정하는 독자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2022년 새해 벽두, 먼 곳의 따듯한 이야기를 오래도록 읽었다. 문득 책장을 덮고 무언가를 쓰기 위해 밑줄을 그어보다가 교시(敎示)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해묵은 수필의 기능을 나타내는 이론적 용어이기도 하지만 물론 그런 의미는 아니었다. 삶의 다양성에 관한 사유를 이국을 배경으로 읽고 정리하면서 감사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배우는 기회였다고 자평하고 싶다.
비록 지면을 통해 만난 작가의 삶이지만 새로운 일 년을 살기에 좋은 가르침이었고 또한 설날을 앞둔 겨울의 즐거운 독서였다. 작가의 일상이 늘 수필집 속의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길 진심으로 기원한다. 또한 작가가 만들어갈 먼 곳의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읽을 수 있기를 희망하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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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동 혁
소설가, 평론가, 동화작가. 2014년 ≪수필미학≫에 문학평론, 2017년≪문학에스프리≫에 소설, 2019년 ≪아동문학평론≫에 동화가 당선되어 등단. 현진건문학상 입상. '허구와 일상의 사유', '소설로 읽는 판타지',『자기소개서 문장이 스펙이다』등을 펴냄. 현재 울산과학대 교양학과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