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2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2

일요시사 0 749 0 0

<1910년 12월 24일~2004년 3월 15일>


우주탐사 세계를 개척한 '로켓 맨' …별을 쏘다 


미국과 러시아는 동서 냉전체제의 한복판에 있었다…

이 불안감을 씻어준 사람이 윌리엄 피커링이었다. 

그가 주축이 된 제트추진연구소는 이듬해 1월 31일 ‘Explorer 1’ 호를 

우주로 날렸다. 이를 기회로 미국은 러시아를 제치고 

우주산업에서 한 계단 올라섰다.




100여 해 전 한 남자아이가 있었다. 이름은 윌리엄 피커링. 1910년 12월 24일 웰링턴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50년 뒤 세계 과학계를 주름잡게 된다. 삶의 영역을 지구에서 우주로 넓힌 장본인이었다.



노벨상 받은 선배가 다닌 초등학교 들어가


 윌리엄 피커링은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고 있던 웰링턴 인근 말보로(Marlborough)로 이사해 헤블록 초등학교(Havelock Primary School, 1863년 설립)에 들어갔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먼저 노벨상을 받은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졸업한 학교였다. 학교 분위기가 좋았던 것일까? 훗날 그는 러더퍼드에 못잖은 과학자 반열에 올랐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웰링턴으로 돌아갔다. 약사였던 아버지는 그를 웰링턴 칼리지(Wellington College, 1867년 설립) 기숙사에 들어가게 했다. 거기서 멘토를 만났다. 수학 선생 찰스 기퍼드(Charles Gifford, 1861~1948)였다. 찰스 기퍼드는 윌리엄 피커링에게 처음으로 천문학을 소개해 주었다. 그는 과학실험실을 만들어 제자와 함께 많은 시간을 연구하는데 보냈다. 이들 사제(師弟)는 큰 망원경으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관찰하며, 서로 꿈을 심어주고 함께 키워나갔다.

 

이후 캔터베리대학에서 공부하던 피커링은 미국에 사는 삼촌의 초청장을 받는다. ‘더 넓은 땅에 와서 공부하라’는 삼촌의 뜻대로 캘리포니아공과대학(캘텍, Cal Tech이라고 함)에 들어간다. 순수과학과 응용과학 분야에서는 사립대학 가운데 가장 좋은 대학이었다.

 


미국 우주산업 앞날 짊어진 자리 올라

 

그곳에서 윌리엄 피커링은 전기공학 학사와 석사,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6년에는 캘텍 교수 자리를 얻었다. 한때 그는 뉴질랜드로 돌아간 적이 있었다. 할 수 있으면 고국에서 직업을 찾아 살고 싶었다. 

 

뉴질랜드 사회는 피커링을 훌륭한 과학자로 키우려고 그랬는지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미국에 정착한 그는 세계적인 우주 과학자로 발돋움해 탄탄대로를 걸었다.

 

1944년 윌리엄 피커링은 교수 생활을 하면서 제트추진연구소(Jet Propulsion Laboratory)에 몸을 담았다. 주로 무선 조종 연구에 몰두했다. 12년 뒤 연구소 총책임자 자리에 올랐다. 미국, 영국에서 온 내로라하는 학자들을 제치고 미국 우주산업의 앞날을 짊어진 수장이 됐다. 그곳에서 피커링은 1976년까지 밤하늘에 빛나는 별 못잖은 찬란한 업적을 쌓았다. 패서디나(Pasadena)에 있는 이 연구소는 훗날 미국 우주산업의 중요한 거점 역할을 했다.

 

그는 단순히 과학자의 길만 걷지 않았다. 정치인들과 군사 전문가들에게 우주산업의 중요성을 외쳐 미국이 이 분야 선도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미국은 러시아(구소련)보다 우주산업에서 한참 뒤처졌을지도 모른다.

 


우주 상공으로 ‘Explorer 1’호 쏘아 올려

 

윌리엄 피커링의 제대로 된 가치는 1958년 1월 마지막 날에 드러났다. 4개월 전(1957년 10월 4일) 러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스푸트니크’(Sputnik)라는 인공위성을 쏘아 올렸다. 이 일로 미국의 자존심은 땅으로 추락했다.

 

미국과 러시아는 동서 냉전체제의 한복판에 있었다. 더구나 군사 분야에서는 한 치 양보도 없는 물밑 싸움이 진행 중이었다. 그러던 때에 하늘을 먼저 차지한 러시아를 바라보는 미국 사람들의 불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 불안감을 씻어준 사람이 피커링이었다. 그가 주축이 된 제트추진연구소는 이듬해 1월 31일 ‘Explorer 1’ 호를 우주로 날렸다. 이를 기회로 미국은 러시아를 제치고 우주산업에서 한 계단 올라섰다.

 

미국 사람들에게 ‘로켓 맨’으로 불렸던 윌리엄 피커링은 그 뒤 20여 해를 우주산업의 새 마당을 여는데 힘을 쏟았다. 제트추진연구소는 우주탐사의 선봉장 노릇을 톡톡히 해냈다. ‘Explorer 3’호는 ‘밴 엘런 대’(Van Allen Belt,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방사능을 가진 층)를 발견했다. 1962년에는 화성과 금성 탐색용인 무인우주선 마리너 2호(Mariner 2)를 발사해 금성 표면의 온도를 처음으로 알아내는 등 큰 우주탐사분야에 발자취를 남겼다.

 

3년 뒤인 1965년 7월 지구를 떠난 마리너 4호(Mariner 4)는 228일 동안 우주 상공을 일주하면서 화성을 지날 때 찍은 스물두 개 영상 이미지로 ‘화성이 생명체의 서식지'라는 일반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아 주었다.



1969년 달 착륙에도 큰 도움 줘

 

1969년 7월 20일은 미국 우주비행사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달 표면에 발자국을 찍은 날이다. 우주탐험 역사를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뜻깊은 사건이다. 윌리엄 피커링 같은 과학자들이 일군 쾌거라 할 수 있다.

 

그는 제트추진연구소를 떠나기 전까지 수성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 같은 우주탐사의 총책임자로 일했다. 연구소를 그만두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년 동안 학생을 가르치기도 한 피커링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폐목재로 재활용 팔레트를 만드는 회사를 세웠다.

 

그는 시사잡지 《타임》(Time)에 두 번이나 표지 인물로 올랐다. 정치가가 아닌 과학자로서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1975년에는 미국 대통령 제럴드 포드(Gerald Ford, 1913~2006)로부터 과학상을 받았다.


 비록 그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뉴질랜드는 뉴질랜더(New Zealander)로서 세계 역사에 끼친 업적을 높이 사 그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다. 또 피커링은 2003년 뉴질랜드에서 제일 높은 명예인 ‘디 오더 오브 뉴질랜드’(The Order of New Zealand)를 얻었다.

 

제트추진연구소 소장 찰스 엘라치(Charles Elachi, 1947~)는 이렇게 말했다. 

 “피커링 박사는 미국 우주탐험 역사의 거장 가운데 거장이었다. 미국을 우주의 주역이 되게 한 공은 그의 탁월한 지도력 덕분이었다. 그가 남긴 업적은 영원히 기억되리라 믿는다.”

 

뉴질랜드가 낳은 ‘과학계의 별’은 2004년 3월 15일 숨을 거뒀다. 윌리엄 피커링은 수십 억년 우주 역사에 견주면 한 세기도 못 미치는 짧은 생을 살았다. 하지만 그가 맺은 결실 때문에 오늘도 수많은 과학자가 끊임없이 무한도전을 하고 있다. 저 높고 높은 곳을 향하여.



* 오클랜드 알바니에 있는 도로 William Pickering Drive는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글_박성기>


bc638ce3160503d76fad27d55643f5e7_1648508820_070485.jpg
 


0 Comments
광고 Space available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KakaoTalk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