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9
<1937년 12월 5일~>
'로저노믹스' 정책 성공해 '경제개혁가' 명성 얻어
뉴질랜드 경제는 새롭게 짜였다.
군살이 떨어지고 경제 구조가 탄탄해졌다.
우체국 같은 공공기관이 민영화되고 기업에 주는
공공 보조금도 크게 줄었다. 관세도 내려갔다.
노동당이 1930년대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뒤 가장 과감한 제도였다.
경제가 어렵다고 이곳저곳에서 난리다. 한국은 물론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먹고사는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뉴질랜드도 예외는 아니다.
사람들은 이럴 때 시대의 영웅을 생각한다.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슈퍼맨 같은 지도자를 찾고 있다. 보통 사람들은 그저 ‘먹고 사는 데 불편만 없게 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
뉴질랜드 경제가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특별 조치를 취해 국민들이 ‘새 뉴질랜드’를 맛보게 해 준 로저 더글러스는 그런 점에서 ‘영웅’임이 분명하다.
3년 만에 가장 나이 어린 장관으로 입각
로저 더글러스는 1937년 12월 5일 오클랜드에서 태어났다. 명문 공립학교인 오클랜드 그래머 스쿨(Auckland Grammar School, 남자 공립 중등학교, 1868년 설립)을 마치고 오클랜드대학에서 회계학을 전공했다. 사회생활 첫 경험은 브렘워스 카펫회사(Bremworth Carpets)에서 총무부장으로 일한 것이다. 이후 마누카우 시의회 재무부서에 근무하며 3년 동안 현장 감각을 익혔다.
1969년 서른두 살 나이에 그는 뉴질랜드를 구원하겠다며 노동당의 일벌로서 비하이브(Beehive, 국회의사당)에 들어갔다. 오클랜드 마누카우 지역구에서 첫 영광을 안았을 때 아버지 노먼 더글러스(Norman Douglas, 1910~1985)도 오클랜드 센트럴 지역구 의원으로 뽑혔다. 부자(父子) 국회의원이 태어났다. 영국에서 이민 오기 전부터 정치인 가문에서 커온 로저 더글러스는 6년을 아버지와 같은 당에서 일하며 정책을 만들었다.
더글러스는 국회의원으로 스무여 해를 지내며 뉴질랜드 정치의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했다. 뉴질랜드가 세워진 뒤 수많은 정치인이 명멸했지만 그의 이름은 늘 역사 전면에 놓여 있었다.
첫 임기 3년 동안 착실하게 의정 수업을 쌓은 로저 더글러스는 다음 총선에서 무난하게 자리를 지켰다. 당 지도부는 그를 방송, 우체국, 주택과 관세담당 장관으로 임명했다. 가장 나이 어린 장관이었다. 초선 국회의원 때 노인연금제도를 입안해 ‘눈여겨볼 만한 젊은 정치인’으로 인정 받은 덕분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실력을 보여주기도 전에 국민당(National Party)으로 정권이 넘어갔다. 1975년부터 84년까지 ‘빼앗긴 10년’ 동안 로저 더글러스는 실력을 닦으면서 버텼다. 야당 의원으로 일하던 이 기간에 그는 재무담당 대변인을 맡았다.
‘로저노믹스’(Rogernomics) 찬성 반대 엇갈려
1984년 말 노동당이 정권을 되찾았다. 로저 더글러스가 40대 중반이 막 넘었을 때였다. 6선 중진 국회의원이 된 그는 물 만난 고기처럼 갈고닦은 역량을 드러냈다. 그가 맡은 역은 재무부 장관이었다.
이때부터 뉴질랜드 경제는 새롭게 짜였다. 군살이 떨어지고 경제 구조가 탄탄해졌다. 우체국 같은 공공기관이 민영화되고 기업에 주는 공공 보조금도 크게 줄었다. 관세도 내려갔다. 노동당이 1930년대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한 뒤 가장 과감한 제도였다.
‘로저노믹스’로 불리는 이 정책으로 한때 실업률이 갑자기 높아져 뉴질랜드는 혼돈의 시기를 맞았다. 오랫동안 힘을 실어준 노동당 지지자들이 등을 돌렸지만 국민당 지지자들이었던 농장주들이 뜻을 같이하면서 로저노믹스는 자리를 잡아갔다.
‘작은 정부’의 틀을 만들어 공무원을 많이 줄이고 재정규모를 가장 적게 했다. 역사가는 로저 더글러스를 ‘뉴질랜드의 현 경제를 만들어 놓은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로저노믹스에 대한 반대 여론도 만만치 않았지만 1987년 총선에서 다시 노동당이 집권한 걸로 미루어 그의 정책은 대체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었다. 게다가 1985년 유럽에서 발행되던 유로머니(Euromoney)라는 잡지에서 로저 더글러스를 ‘올해의 재무장관’으로 뽑았다. 그가 나쁜 조건을 꿋꿋이 견디며 경제개혁을 일궈낸 노고를 보상받은 셈이다.
하지만 노동당 사정은 좋지 않았다. 로저 더글러스는 점점 한직으로 밀렸다. 1987년 주식시장이 무너졌다. 노동당은 이 문제를 무마시킬 희생양이 필요했다. 자연스럽게 로저 더글러스가 맡은 일을 줄였고 1989년 경찰부 장관 겸 이민부 장관으로 내려앉히는 수모를 겪게 했다.
로저 더글러스는 1989년 11월 정치에서 손을 떼겠다고 선언했다. 이듬해 7월 정식으로 노동당에 작별을 알렸다. 눈물과 기쁨으로 버무려진 스무 해 의정 생활이 끝났다.
현직에서 물러난 뒤 더 바빠져
살아생전에는 인정을 못 받다가 죽고 나서야 제대로 빛나는 예술가가 있듯 정치에서 물러난 로저 더글러스는 외국에서 경제 강의를 하며 주가를 올렸다. 뉴질랜드에서는 본의 아니게 악역을 맡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나라를 살릴 수 있는 경제 개혁의 전도사’로 대접받았다.
현직에서 물러난 로저 더글러스는 더 바빠졌다. 많은 나라가 그를 찾았다. 러시아, 멕시코, 캐나다, 페루, 호주, 남아공…. 로저 더글러스가 해 준 도움말은 ‘경제개혁의 교과서’가 됐을 정도다.
1990년대 말 한국이 IMF체제로 넘어가면서 대책으로 내놓은 해법이 로저노믹스를 한국 경제에 적용하는 일이었다. 그 덕택인지는 잘 모르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제일 빨리 IMF체제를 넘겼다.
로저 더글러스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소비자운동을 펼쳤다. 1993년 소비자와 세금납부자협회(Association of Consumers and Taxpayers, 뒷날 ACT<행동당>로 바뀜)를 만들어 자기가 못다 이룬 경제개혁의 꿈을 시민단체 형식으로 풀어나가고자 애썼다.
이 협회는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제(Mixed Member Proportional 제도)가 생기면서 정당으로 바뀌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협회(정당)였지만 행동당이 자기 정책을 제대로 뒷받침해주지 않는다며 2004년 탈퇴하게 된다.
로저 더글러스는 훗날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아쉽게도 옛날 영화는 다시 찾을 수 없었다. 새 술이 필요한 것은 새 부대였다.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라고 했는데 뉴질랜드가 지금 필요로 하는 사람은 사라질 노병이 아니라, 새 기운을 불어넣어 줄 스타(장성)라는 점을 로저 더글러스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글_박성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