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0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0

일요시사 0 725 0 0

<1871년 8월 30일~1937년 10월 19일>



20세기 원자 시대를 연 '현대 핵물리학의 아버지'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본인 업적에 못지않게 후학 양성에 힘쓴 과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여섯 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캐번디시연구소 출신까지 따지면 서른 명에 이르는 과학자가 

노벨상의 명예를 안았다. 캐번디시연구소는 말 그대로 노벨상의 산실이요, 

현대 과학의 요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뉴질랜드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과학자는 누구일까?

 1908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어니스트 러더퍼드를 꼽는 데 주저할 사람은 거의 없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은 그를 일컬어 ‘제2의 뉴턴’이라고 칭했다.




뉴질랜드 100달러 종이돈에 새겨져


 과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뉴질랜드에 살고 있다면 상식에 속하는 일인 만큼 100달러짜리 종이돈을 살펴보기 바란다. 뉴질랜드 종이돈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화폐에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점잖게 자리하고 있다. 화폐 단위로 따져 사람 가치를 가름한다면 뉴질랜드에서 가장 값비싼 사람인 셈이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871년 8월 30일 넬슨의 시골 마을, 스프링 그로브(Spring Grove)에서 열두 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농부이자 수레바퀴를 만드는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였다. 어렸을 때부터 유독 과학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어머니가 골라준 책을 읽고 기계 짜 맞추기에 몰두했다. 

 

아버지가 수레바퀴 만드는 일을 곁눈으로 보아왔던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시계와 카메라를 분해한 뒤 다시 짜 맞추는 놀이를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일로 여겼다. 그런 아들을 옆에서 지켜본 어머니는 여러 과학책을 읽히며 영감을 북돋웠다. 영연방의 변두리로 여겼던 뉴질랜드 산골에서 20세기 원자 시대의 화려한 개막을 알린 과학자는 그렇게 탄생했다.




칼리지 때 최우수 졸업생 차지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장학금을 휩쓸며 중등학교(College), 대학 학사, 석사 과정을 마쳤다. 칼리지 땐 덕스(Dux, 최우수 졸업생)를 차지하면서 ‘꿈의 학생’으로 불렸다.

 

어니스트 러더퍼드에게 뉴질랜드는 너무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였다. 몇 해 기다림 끝에 세계박람회 기념 장학금을 받아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으로 떠났다. 시골에서 감자를 캐다가 합격 소식을 들은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이제 더는 감자 따위나 캐고 있지 않을 거야”하며 들고 있던 삽을 내 던졌다. 

 

기대에 부풀어 영국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따뜻한 환대가 아닌 ‘냉엄한 현실’이었다. 결국 무선통신 송수신기 개발에 뛰어들어 한몫 잡아보려고 했던 야망을 포기하게 된다. 고국에 두고 온 약혼녀도 데려오고 영국 여행 경비로 빌린 돈도 갚아야 하는 처지였지만 다부진 마음을 먹고 연구를 계속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10여 해 온갖 고생을 견뎌내며 연구에 몰두한 결과물은 노벨 화학상이었다. ‘원소 붕괴와 방사성 물질의 화학에 관한 연구’(Disintegration of elements and the chemistry of radioactive substances)는 그에게 뉴질랜드 태생으로는 첫 노벨상 수상자란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캐번디시연구소 ‘노벨상의 산실’로 자리 잡아 

 

영국, 캐나다, 다시 영국 이렇게 돌고 돌며 교수와 연구원으로 활동하던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1907년 맨체스터대학에 짐을 푼다. 더는 ‘뉴질랜드 촌놈 과학자’가 아니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20세기 현대 물리학의 새 마당을 연 인물, 또 과학계 다크호스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를 ‘핵물리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이유는 ▷방사성 물질의 붕괴와 변환 ▷라듐으로부터 나오는 입자들 ▷원자구조에 관한 이론 ▷인위적 원소 붕괴에서 뛰어난 연구업적을 남겨서다. 

 

1919년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강력한 후원자이자 스승이었던 톰슨(J. J Thomson) 교수 뒤를 이어 케임브리지 캐번디시연구소(Cambridge’s Cavendish Laboratory) 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후학 양성에 힘을 쏟았다. 제자들과 함께 중수소의 예언, 디락의 양전자 이론의 발전, 제임스 채드윅의 중성자 발견에 큰 공을 세웠다. 1930년대 물리학은 그의 지휘 아래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본인 업적에 못지않게 후학 양성에 힘쓴 과학자로 유명하다. 그가 가르친 제자 가운데 여섯 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캐번디시연구소 출신까지 따지면 서른 명에 이르는 과학자가 노벨상의 명예를 안았다. 캐번디시연구소는 말 그대로 노벨상의 산실이요, 현대 과학의 요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스물한 개 대학에서 박사 학위 받아

 

비록 멀고 먼 영국 땅에서 이름을 떨치기는 했지만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어린 날 뛰놀던 고향을 잊을 수 없었다. 키위에게 ‘뉴질랜드의 영웅’으로 떠오른 그는 뉴질랜드가 선진국으로 나아가려면 농업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장으로 1926년 연구소(New Zealand’s Department of Scientific and Industrial Research)가 세워져, 뉴질랜드가 오늘날 농업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 세계 스물한 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뉴질랜드 러시아 캐나다 스웨덴 네 나라의 우표 인물로 뽑힐 만큼 존경을 받은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60대 말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한다.

 

1937년 10월 어느 날, 별장에서 정원 일을 하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의식 불명 상태로 병원에 실려 갔다. 이틀 뒤 어니스트 러더퍼드는 끝내 깨어나지 못하고 학문연구에 마침표를 찍었다. 

 

영국 정부는 현대 핵물리학의 새 마당을 연 뉴질랜드 출신의 큰 과학자 어니스트 러더퍼드를 런던 한복판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현대 과학의 아버지’라고 함)이 누워 있었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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