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52)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기도 <요한복음 17:21~26>
요한복음 17장 전체를 보면, 예수님께서 세 가지 기도를 하십니다. 먼저 하나님과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이고, 이어지는 기도는 예수님 자신이 택한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이 오늘 본문인데, 제자들을 통해서 앞으로 믿게 되어질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앞으로 믿게 되어질 성도들, 누구인가요? 바로 우리들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보지도 못한 이들, 앞으로의 역사 속에서 믿게될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십니다. 따라서 이 기도 속에는 우리 자신을 향한 예수님의 소원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신앙의 삶을 살아가야 할지, 어떤 모습으로 교회를 이루어가야 할지를 이 기도 속에 담아서 하나님께 간구함과 동시에,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이 시간에는 예수님의 기도 속에 담겨진 간절한 소망을 함께 기도문 형식으로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되게 하옵소서.” 본문 21절에서 23절까지 보면, 전체적인 중심 주제가 명확합니다. 21절 중반에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22절 중반에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 23절 중반에도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모든 주제가 분명하죠. 바로 “하나됨”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됨은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하나됨이요, 또한 우리 모든 믿는 자들과의 하나됨을 뜻합니다. 이것을 쉽게 설명한 것이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입니다. 하나님은 농부가 되시고, 예수님은 참 포도나무시고, 우리 믿는 자들은 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예수님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것, 이를 통해 나무와 가지가 하나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고, 농부 되시는 하나님께는 기쁨이 되어집니다.
오늘 본문 26절의 마지막 부분도 보십시오.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도가 처음에는 하나됨에 대해 계속 말씀하던 중에 마지막 마무리는 결국 사랑입니다.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그럼 어떻게 하나됨을 이룰 수 있을까요? 수많은 것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딱 하나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 교회에서 무엇을 바라봅니까?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신앙의 삶 속에 무엇을 바라봅니까?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내 믿음의 시선이 십자가의 주님을 향하고 있으면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예수님과 하나됨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마다 신앙으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함께 동역하는 우리 뉴질랜드광림의 제단에 속한 모든 권속들이 사랑으로 하나됨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모든 믿음의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안에 하나됨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 기뻐하시는 모습입니다. 주 안에서 하나됨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온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4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마태복음 5장의 마지막 절인데, 앞선 내용들을 보면, 팔복의 말씀, 소금과 빛의 말씀, 율법에 관한 말씀, 노하지 말라는 말씀, 간음하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 그리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말씀을 전하신 후에 마지막 결론처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온전함에 있어서도 방향성은 똑같습니다. 하나됨을 위해서 같은 방향, 특별히 믿는 자로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하는 것처럼, 온전함에 있어서도 그 방향은 동일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온전함이라는 것은 흠이 없는 것입니다. 모자람이나 과함이 없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뭔가 기준이 필요하겠죠. 예수님께서는 그 기준을 이렇게 제시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라.” 너무 기준이 높은 것 아닌가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온전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애초에 우리가 온전함을 이루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요? 본문 23절에 말씀합니다. 여기에 길을 제시합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이건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거함으로 역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온전함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온전함은 내 힘을 가지고, 내 의로움을 가지고, 내 공로를 가지고, 서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의 자녀됨의 권세, 예수님의 십자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그것이 온전함을 이루는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우리도 온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주님을 내 안에 모시면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전적으로 주님만을 의지하면 온전함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습니다. 언제나 말씀과 기도 위에 굳건히 서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는 자의 온전함을 날마다 추구하고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기도입니다.
“우리 모두 증인되게 하옵소서.” 증인은 법정용어입니다. 어떤 사건에 대해서 그것을 증명하는 사람입니다. 초대교회 스데반을 비롯하여,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증인됨의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 말씀 그대로 오순절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나아가 복음의 증인이 됩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교회를 향한 핍박이 오고, 점점 믿는 자를 향해 더욱더 극심한 박해가 옵니다. 견디다 못한 그리스도인들이 여기 저기로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쫓겨났습니다. 그러면 도망간 곳에서는 조용히 살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계속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다가 잡혀 죽임을 당하는데도 복음을 전합니다.
왜요? “성령의 충만함”이 있기 때문에,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수많은 제자들과 성도들이 순교의 죽임을 당합니다. 증인됨의 사명을 감당하고자 핍박과 고난과 죽임을 당합니다. 그럼 우리가 증인되고자 하면 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나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를 보면 하나됨을 위한 간구, 온전함을 위한 간구가 나오는데,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 믿음의 백성들의 증인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영광, 그것을 직접 체험하고, 또한 삶으로 증거하길 원하십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성경적인 지식이 많았을까요? 성경적인 지식과 신앙의 삶에 있어서 아는 것은 우리가 훨씬 더 많습니다. 예수님 제자들보다도 우리가 지식적으로는 더 뛰어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삶에 예수 믿는 자의 증거, 예수의 흔적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우리는 모두 증인됨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 삶을 통해,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에 속한 모든 권속들의 신앙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 예수 십자가 부활의 영광을 담대히 전하는 증인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