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21; 교육이론가 - 클래런스 비비 (Clarence Beeby)
<1902년 6월 16일~1998년 3월 10일>
“온 국민에게 가장 좋은 교육을…” 꿈을 현실로 만들다
클래런스 비비가 ‘뉴질랜드를 빛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서다.
그는 신분에 상관없이 뉴질랜드 국민이라면 누구나 배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70여 해 전만 해도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한평생 살면서 겪는 많고 많은 설움 가운데 못 배운 설움이 제일 크다. 초라한 행색이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돈은 벌면 되지만 교육은 제때 받지 못하면 영영 기회를 놓친다. 그걸 ‘못 배운 한’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공부도 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어느 나라든 모든 사람이 교육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뉴질랜드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0년대 전만 해도 교육은 몇몇 사람만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학업 능력이 떨어지거나 부모가 돈이 없으면 교육을 받기가 어려웠다. 다 타고난 운명으로 생각했다.
클래런스 비비가 ‘뉴질랜드를 빛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록되는 이유는 국민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서다. 그는 신분에 상관없이 뉴질랜드 국민이라면 누구나 배울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70여 해 전만 해도 얼토당토않은 말이었다.
17세 젊은이, 평신도 설교자로 강단에 서
클래런스 비비는 1902년 6월 16일 영국 요크셔(Yorkshire)에서 태어났다. 네 살 무렵 부모를 따라 크라이스트처치로 이민을 왔다. 어릴 때부터 슬기롭고 똑똑했던 그는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뉴 브라이턴 스쿨(New Brighton School)에서 덕스(Dux, 최우수 졸업생)를 받을 정도로 재능 있는 젊은이였다. 대학에서 주는 장학금도 탔다. 한마디로 공부에서만큼은 크게 될 떡잎이었음을 일찌감치 보여주었다는 얘기다.
클래런스 비비가 무엇보다 좋아했던 수업은 토론과 연극이었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감리교 평신도 설교자로 강단에 섰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설득력 있게 많은 사람 앞에서 자기주장을 폈는지를 잘 보여 주는 대목이다.
1920년 클래런스 비비는 캔터베리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갑자기 진로를 바꿔 크라이스트처치 트레이닝 칼리지(Christchurch Training College)로 옮겼다. 교사가 되고 싶었던 그는 거기서 한 여성을 만났다. 앞날 아내가 될 비어트리스 뉴넘(Beatrice Newnham)이었다.
둘은 캔터베리대학 교육과 제1호 교수인 제임스 셸리(James Shelley, 1884~1961) 밑에서 뉴질랜드 백년대계 교육 틀을 꾸려 나갈 수 있는 자양분을 얻었다. 석사 학위(MA, 1924년)를 받은 그는 영국 맨체스터 유학길에 올랐다. 도움말을 준 스승 제임스 셸리를 믿은 결정이었다. 빅토리아대학(Victoria University of Manchester)에서 박사 학위를 따낸 그는 고국으로 돌아와 크라이스트처치에 있는 캔터베리대학에서 강의를 맡았다.
교육 현장에서 많은 경험을 쌓은 클래런스 비비는 2년 동안 미국과 캐나다를 둘러봤다. 뉴질랜드보다 한 걸음 앞선 교육 체계를 갖춘 나라를 벤치마킹하며 시험 방법, 직업교육 같은 알짜배기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이름뿐인 연구소, 유명 연구소로 바꿔
클래런스 비비는 캔터베리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명교수 명강의 명논문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진가는 곧 뉴질랜드 교육계에 알려졌다. 정부가 ‘인재'를 가만히 놔둘 리가 없었다. 첫 번째 맡겨진 공직은 뉴질랜드교육연구소 소장 자리였다. 그는 이름뿐이었던 연구소를 뉴질랜드 교육의 요람으로 만들었다.
교육부 장관 피터 프레이저(Peter Fraser, 1984~1950)가 그를 만나 “뉴질랜드 교육 틀을 한번 잡아보자”는 제안을 했다. 두 사람은 일심동체가 되어 일사천리로 진행해 나갔다. 더러 마찰이 있기는 했지만 큰 뜻에서 뉴질랜드 교육에 새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때 나온 표어가 ‘모든 국민에게 교육을…’이었다. “학업 능력에 상관없이, 부모가 부자든 가난하든, 도시에 살든 시골에 살든 모든 사람은 제일 좋은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말이었다. 지금 들으면 평범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교육계에 큰 화제를 일으킨 선언이었다. 그 뒤 온 국민이 돈 한 푼 안 내고 나라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질 좋은 교육 위해 적정 학생 수 주장
클래런스 비비는 20여 해 동안 뉴질랜드에 꼭 맞는 교육정책을 세워나갔다. 학위, 대학 입학 체계, 예술과 기술교육, 야외 교육활동 같은 기틀을 마련했다.
클래런스 비비는 2차 세계대전 중이어서 교사도 부족하고 또 출생률 증가로 학생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질 좋은 교육이 이뤄지려면 한 학급에 학생 수가 적정 숫자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 정책을 비비즘(Beebyism)이라고 했는데 교육 현장에서는 적용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종종 시빗거리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그는 백년대계 원칙에 따라 차근차근 일을 진행해 나가면서 뉴질랜드 교육 틀을 다졌다.
또 쿡 아일랜드(Cook Island), 니우에(Niue), 웨스턴 사모아(Western Samoa) 같은 태평양 섬나라를 찾아가 교육 체계를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자기만의 노하우를 수출한 셈이다.
여세를 몰아 클래런스 비비는 국제 교육계로 진출했다. 1, 2차 세계대전 뒤 전쟁으로는 더 세계평화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점을 깨달은 세계 강국들은 1945년 유네스코(국제 연합 교육•과학•문화 기구)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뉴질랜드 대표로 유네스코 참석
클래런스 비비는 1946년 유네스코 모임에 뉴질랜드 대표로 참석했다. 1948~49년에는 고위 임원을 맡았고 1962년에는 부총장에 올랐다. 뉴질랜드 교육책임자에서 세계 교육책임자로 껑충 뛰어올랐다.
유네스코에서 물러난 클래런스 비비는 또 다른 세계로 역량을 넓혀 나갔다. 하버드대학과 런던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경험을 살려 후학을 돌보았다. 1970년대부터 1987년까지 그는 개발도상국들을 찾아다니며 교육 체계를 잡아 주었다. 리비아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탄자니아 같은 나라였다.
오타고대학, 캔터베리대학, 빅토리아대학은 클래런스 비비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었다. 교육 부문에서는 누구도 그 발자취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1987년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명예인 ‘디 오더 오브 뉴질랜드’(The Order of New Zealand)상이 제정됐다. 이때 설립 위원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클래런스 비비였다.
클래런스 비비는 1998년 3월 10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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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시사는 뉴질랜드 작가 박성기씨의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_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를 연재한다. 오래 전 ‘크리스천라이프’에 실은 글을 박 작가가 2016년 원고를 다시 다듬어 같은 제목으로 책으로 펴냈으며, 이번에 교민들의 뉴질랜드 역사 이해를 돕고자 싣게 되었다.<편집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