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9);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18~25>
오늘 제목으로 삼은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는 모두 다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입니다. 예수는 “구원자”라는 뜻으로 본문 21절에 기록된대로 천사를 통해서 나시기 전에 이미 지어진 이름입니다. 임마누엘은 이름이라기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은 호칭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이 땅 가운데 오셔서 정말 나와 함께 계신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은 예수님의 직임과 연관됩니다. 그리스도는 헬라어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메시야”가 됩니다. 예수님을 향해 “그리스도” 또는 “메시야”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분으로서, 우리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고, 친히 대제사장이 되셨고, 또한 선지자로서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감당하셨음을 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가지신 이름 자체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구원의 역사, 예수님의 사명, 이 모든 것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 이름만 들어도 우리 안에 감동이 있어야 합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오십니다. 어떠한 모습으로 주님을 맞이해야 할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준비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적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정혼한 사이로 결혼 할 날을 기다리고 있는 차에, 마리아가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아내 될 여인이 아이를 가졌다니 요셉의 입장에서 얼마나 황당한 일이겠습니까? 그럼에도 요셉은 차분하게 이렇게 행동합니다. 19절입니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특별히 유대 사회의 관념 속에서 “의로운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율법을 따르고, 주의 말씀 앞에 부끄러움 없는 모습으로 살고자 했다는 뜻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의로운 사람 요셉은 아내될 여인인 마리아가 처녀로서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그 사실을 만방에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마리아를 향해 돌을 들어 쳐야했습니다. 이를 통해 “나는 하나님의 법을 수호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로움을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오히려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합니다.” 의로움으로는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요셉 안에 있었던 사랑과 용서의 성품이 의로움을 품어 안습니다.
마리아는 어떤가요? 마리아 입장에서는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웠을까요? 누가복음 1장을 보면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습니다. 그러자 마리아가 두려움 가운데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누가복음 1장 38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이 대답 하나에 마리아의 결단과 믿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리아의 믿음과 결단으로 준비된 모습이 예수님의 육신의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누리게 합니다. 예수님을 구원의 주로 내 안에 모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주의 뜻을 따라서 순종함으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주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또한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요셉과 마리아처럼 준비된 모습으로 예수님을 맞이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은 단 하나의 목적입니다. 21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우리가 부르는 예수라는 이름은 라틴어입니다. 본래 예수라는 이름의 원형은 구약의 “여호수아”로 그 뜻은 “하나님은 구원이시다.”입니다. 따라서 예수라는 이름은 예수님 자신의 구원자되심보다는,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는 분임을 증거하는 표현입니다. 물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역사를 완성하시죠. 또 우리는 십자가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 믿는 자에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데, 늘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 믿는 자라고 한다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신 목적은 본문에도 분명히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과 믿음은 다른 겁니다.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내 죄가 사함 받았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죄에 묶인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이러한 확고한 믿음의 고백과 더불어 “나는 이제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구원의 확신이 내 안에 딱 새겨져야 합니다. 이게 바로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의 구원의 확신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자로서 구원의 확신 안에 거할 뿐만 아니라, 그에 합당한 믿음의 본이 되는 삶을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말씀의 성취를 누려야 합니다.
본문 22절에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어지는 23절도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주신 예수 탄생의 예언입니다. 본문에서 이어지는 2장 6절에도 다시 한 번 말씀합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이 말씀은 미가서 5장 2절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이 말씀의 성취임을 끊임없이 증거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실 메시야 예수님의 모습이 예언되었고, 2천여년전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면, 그것이 끝인가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 승천, 이 사실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는 것, 이것으로 끝인가요? 성탄의 기쁨을 누리는 것, 이게 끝인가요? 더 중요한 것이 남아있죠. 바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대강절 첫 번째 주에도 말씀드렸습니다. 대강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이미 이 땅 가운데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기다림, 단순하게 12월 25일 성탄절을 기다리는 것이죠. 그리고 또 하나는 부활 승천하셔서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면서 이 땅에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지금 정말 중요한 기다림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에 여러차례 왕 노릇하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누가요?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고백한 이들이 주와 함께 왕 노릇합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 오심이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처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이라는 예언의 말씀도 성취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약속하신 축복된 말씀의 성취가 우리 모든 믿는 자를 위해서 예비되어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주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주의 말씀 붙잡고, 약속된 말씀의 성취를 내 것으로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