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7) 기다림을 지나 그날이 오면 <이사야 9:1~7>
이 시간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기다림을 지나 그 날이 오면”입니다. 이 제목 안에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는 우리가 지금 기다림의 절기인 대강절을 지내고 있기에, “대강절, 기다림을 지나서 성탄절, 그 날이 온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지난 15주간 영상으로만 예배를 드리고 있었기에, “기다림을 지나 오늘 함께 모여 예배하는 날을 맞이했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말씀하는 것과 같이, 고통과 고난의 시간 속에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향한 기다림을 지나 메시야의 오심이라는 그날을 맞이한다.”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믿는 자로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는 그날을 기다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기다림의 시간을 지내며, 그날을 바라보는 중에 있습니다. 기다림을 지나 그날이 오면 어떠한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에게 펼쳐질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소망하며 또한 누려야 할 것인가? 대강절 기다림의 절기 두 번째 시간에,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내 삶에 반전의 새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기다림을 지나 그날이 오면, 내 삶 속에 반전의 새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반전, 여러분! 반전 좋아하시죠. 드라마를 보더라도, 영화를 보더라도, 반전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늘 생각합니다. “이렇게 그냥 끝나지는 않겠지?” 그래서 지금은 한번의 반전이 아니라,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거듭하는 영화나 드라마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반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과 2절입니다. 특별히 1절 후반부에 보면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 받던 땅에서 영화로운 땅이 되었다.”라고 말씀하죠. 스불론과 납달리는 열 두 지파 중에 큰 영향력이 없던 지파입니다. 그런데 그 땅이 영화롭게 됩니다. 존재 가치 자체가 달라집니다. 어떻게요? 마태복음 4장에도 오늘 본문이 인용되어 있는데,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지역이 바로 이 곳, 스불론과 납달리 땅 갈릴리 주변입니다. 멸시 받고 천대받던 땅이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영화로운 땅이 됩니다. 오늘 본문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성취되고, 반전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스불론과 납달리에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납니까? 성경 속에서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나요? 교회에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까요? 기다림을 지나 그날이 오면 내 삶에 반전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우리는 죄악 속에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미 반전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의 삶을 통해 새로운 반전의 역사를 이루어가야 합니다. 교만했던 나, 세상적인 욕심에 마음 빼앗겼던 나, 용서하지 못했던 나, 언제나 부족함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나로부터 예수님의 빛을 내 안에 품은 나로, 예수의 흔적을 새겨가는 나로,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반전의 새역사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기다림을 지나 그날이 오면, 임마누엘 예수님의 통치하심 안에 거하게 됩니다. 오늘 읽지는 않았지만, 앞선 7장 14절에도 메시야 탄생의 예언이 나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완전하고도 직접적인 예언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장 23절에도 보면 이 말씀을 인용하면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의 뜻까지 설명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합니다. 뜻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예수라는 말은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실까요? 그 이름 그대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저 높은 하늘보좌를 버리시고, 이 낮은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그저 힘들고 어려운 자의 친구가 되어 주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어떤 분인지 6절에서 증거됩니다. 본질상 우리가 함께 할 수 없는 분입니다.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너무 높은 곳에 계신, 범접할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떤 모습으로 함께 하시나요? 먼저 “기묘자요, 모사”입니다. 이 말은 아주 놀라운 모사라는 말입니다. 모사는 좋은 작전이나 계획을 말해주는 사람이죠. 예수님께서 기묘자와 모사라는 것은 인간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를 그 길로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은 말 그대로, 전능하신 –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또한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역시 영원히 존재하시는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아버지는 자녀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든든한 보호자요 후원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평강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을 허시는 장벽철폐를 이루신 분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도 허무셨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또한 인간들간의 모든 갈등과 다툼의 벽을 허물어버리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기묘자요,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존하시는 아버지시요, 평강의 왕이시요, 세상 모든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와 함께 하심으로 “임마누엘” 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모든 권세와 능력을 함께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임마누엘,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과 늘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여호와의 열심이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기다림을 지나 그날이 오면,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 삶에 반전의 새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하심 아래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본문 9절 마지막 문장에 말씀합니다.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여호와의 열심이 앞서 말씀드린 이 모든 것을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열심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열심은 히브리어로 “카나”라고 합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열심이나 열정”으로 번역을 하고, 또는 “질투”라는 말로도 번역이 됩니다.
다른 성경 구절에서는 엘리야가 바알선지자와의 기도 싸움 이후에 호렙산에서 하나님과 대면하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엘리야가 하나님께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열심이 유별하다.” 여기서 열심은 엘리야가 죽을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확고한 자기 신앙의 고백을 “열심-카나”라는 단어에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이외에도 곳곳에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여기서 질투도 똑같이 히브리어 “카나”를 씁니다.
이건 조금 의외죠.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을 너무나 깊이 사랑하실 때에 “여호와의 열심”이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질투는 완전히 다른 의미 같잖아요. 하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됩니다. 사랑과 질투는 함께 갑니다. 사랑이 아주 깊어지면, 동시에 질투도 강하게 일어납니다. 사랑이 없으면 질투가 생길 일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카나”라는 단어가 깊은 사랑을 뜻하는 “열심”이라는 단어에도, 질투를 뜻하는 단어에도 동시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 열정이 어디를 향해있나요? 인류 구원의 역사를 향해 있습니다. 그 열정이 자신의 목숨까지 내어주면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구원받은 자로서 세상의 삶을 살아갈 때에, 다시 한 번 기다림을 지나 그날이 오면, 주님 앞에 서는 그 날,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이 오면, 영원한 생명의 역사가 우리 삶에 완성되어질 것입니다. 마지막 그날을 향한 소망의 기다림 속에 임마누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축복과 돌보심과 인도하심의 은혜가 가득한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