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35)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히브리서 11:13~16>
오늘 본문의 말씀은 고향을 떠나,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참으로 더 가슴 깊이 다가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믿음장입니다. 계속 반복되는 말씀이 “믿음으로”입니다. 믿음으로 살다간 수많은 인물들을 소개하는데, 본문 13절 마지막 부분에,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다간 모든 사람들을 가르켜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외국인과 나그네” 딱 우리잖아요. 키위가 볼 때에 우리는 “외국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외국인요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다.” 본문에 보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요, 여기서 “땅”이라는 말을 영어성경에서는 “earth”라고 기록합니다.
우리들은 모두 나그네 인생길을 걸어갑니다. 그렇기에 지금 살아가는 세상의 삶에만 얽매여서, 세상의 가치관에만 묶인채 살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을 향한 사모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어디인가요? 하늘보좌, 예수님 계신 천국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어떻게요?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교회에서 천국에 관한 설교가 가장 많이 선포되었던 시대는 우리 어르신들 지나오신, 경제적으로 아주 힘들고 어렵던 시기였습니다. 아무리 일하고 열심히 노력해도 가난의 짐을 벗어버리기 어렵습니다.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늘 마음 속에 그림을 그리죠. “천국의 소망” 지금 당장은 힘들고 어렵지만, 천국에서 완전한 평안과 부요와 기쁨과 행복을 누릴 것을 소망하면서 현실의 어려움을 이겨냅니다. 초대 교회 기독교 신앙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 인해 핍박을 당하면서, 생명의 위기를 겪어가면서도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주님 다시 오시는 날, 천국 문에 이르는 그 순간을 향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이 강할수록, 천국의 소망이 더 간절해지는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달라졌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의 평균 수명도 길어졌고, 그냥 지금 사는 것 자체가 너무 좋은 거예요. 그러다보니 강단의 메시지도,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 실현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메시지가 많아집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자로서, 이 땅의 삶을 마치고 가게 될 천국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지금 나의 삶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믿는 자의 삶에 있어져야 할 구원의 확신, 천국의 소망, 더불어 이 땅에서 누릴 하나님나라입니다. 이러한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는 자, 담대함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본문 13절을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되” 여기서 이 사람들이 누구인가요? 앞서 설명한 믿음으로 살아간 모든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약속을 받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고 합니다.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합니다. 이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지나요? 14절입니다.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하늘의 소망을 품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눈으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믿음을 가지고 죽었습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는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담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오늘 복된 삶을 살아갑니다.
송길원목사님이라는 분이 지은 “카르페디엠”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 일부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세상에 내가 태어난 날 나는 울었고 모두 웃었네. 이 세상 떠나는 날 나는 웃고 모두 울기를 바래. 삶이 즐거웠다면 떠남도 즐거워야지. 영원히 살 것처럼 꿈꾸고 내일 떠날 것처럼 사랑해야지. 언젠가 지구별 소풍 끝나는 날 후회 없는 인생 살았노라. 내일이 아닌 오늘을 살아야 카르페디엠 카르페디엠. 죽음을 기억해 그날을 기억해 메멘토모리 메멘토모리.”
이 땅에 나그네로서 잠시 왔다 가는 삶을 가사로 적었습니다. 그 중에 마음 속에 남는 두 가지 라틴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카르페디엠” 또 하나는 “메멘토모리”입니다. 카르페디엠은 “지금 현재를 즐겨라.”라는 뜻이고, “메멘토모리”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것 같지만, 서로가 완전히 하나로 이어지는 말입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영화에 보면, 주인공으로 나온 로빈 윌리암스가 학생들에게 “카르페디엠”에 담긴 의미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카르페디엠-현재를 즐기라.” “카르페디엠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그 이유는... “우리는 반드시 죽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학생에게 숙제가 있습니다. 내일 가져갈 숙제를 다 했어요. 그리고 오늘 게임하면서 즐깁니다. 그런데 다른 학생은 숙제를 하지 않고, 오늘 게임을 하면서 즐깁니다. 즐기는 것은 똑같아 보이지만, 마음 상태는 다를 겁니다. 또한 내일이 되어 마주하게 되는 결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렇기에 “카르페디엠-현재를 즐기라.”에 있어서 반드시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라.”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11장을 전체적으로 보면서, 그 속에 오늘 본문의 위치를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믿음으로 살다간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던 중에 히브리서 기자는 오늘 본문을 일부러 가운데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이 안에 믿음으로 살아간 선진들의 모습에 담겨진 다섯 가지를 드러냅니다. 그 다섯가지는 “확신, 증거, 소망, 분별력, 상급”입니다. 오늘 본문에 명확하게 단어를 들어서 언급하지는 않지만, 본문을 잘 보면 믿음으로 살아간 이들의 삶 속에 담겨진 이 다섯가지의 영적인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들은 천국에 대한 “확신”을 가졌죠. 저들은 이 확신을 삶으로 “증거”했습니다. 또한 천국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갔습니다. 그렇기에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들에게는 그 삶에 합당한 “상급”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이 본문 전체에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이 가장 복된 날입니다. 지나온 과거는 돌아오지 않고, 미래는 오늘에 또 다른 오늘이 더해져 만들어집니다. “메멘토모리-죽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리하여 “카르페디엠-현재를 즐기십시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자는 오늘을 복되게 살아갑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함으로” 오늘, 언제나 새롭게 주어진 오늘을 더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합니다.
본문 16절은 오늘 결론의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예배를 드린 아벨, 그가 이러한 예배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은 그 안에 더 나은 본향을 향한 사모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그가 세상이 아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더 나은 본향을 향한 사모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 본향으로 아예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워졌습니다.
특별히 8절에서 12절까지를 보면 아브라함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다른 믿음의 선조들을 한 두절에 걸쳐 소개한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에게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왜요?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나요? 8절에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그 길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믿음이죠. 이어서 10절에도 말씀합니다.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하나님의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은 당장 아브라함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그 성을 바라보는 영적인 시선이 열려있었다는 것입니다. 역시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이 무엇인지가 본문 16절에 언급되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놓으신 한 성,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믿음의 시선이 열려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아주 단순합니다. 하늘에 소망을 두고, 지금 보이는 것 너머를 바라보고 사모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된 우리들은 모두,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내가 돌아갈 곳, 하나님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라.” 주님 주신 말씀을 붙잡고, 영적 담대함으로, 오늘을 복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