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43); 격(格)이 다른 삶 (3)사랑 <마태복음 5:43~48>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한 없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으로 원수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인해 깨어지고 원수된 관계가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신 사랑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화목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로서의 삶을 살 것을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속에서, 특별히 우리가 정말 “격이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 어떤 사랑의 모습을 가져야 할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차원이 다른 사랑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심 주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이라고 하면 간단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오늘 주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것은 43절과 44절의 말씀 때문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뭐가 문제일까요? 원수사랑입니다. 그럼 여기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냥 좀 만나기 꺼려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게 맘에 안 드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가르켜서 “내 원수”라고까지 단정짓기에는 조금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말로 내가 삶 속에서 아주 극심하게 누군가로부터 고통을 받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한다면, 조금 싫은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비장하게 대할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배경 속에서는 “원수, 너희를 박해하는 자.”가 딱 정해져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는 “너희 원수, 너희를 박해하는 자”하면 공통적으로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가요? 로마제국이요, 더불어 같은 유대인이면서도 로마제국의 힘을 엎고 동족을 압제하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이 말씀이 선언될 때에, 아마도 곳곳에서는 탄식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 저 예수님 우리 편인줄 알았는데, 아닌가봐. 아니 어떻게 저 로마제국을 사랑하라고 하지? 어떻게 같은 동족이면서도 우리를 못 살게구는 저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할 수 있지?”
이를 통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격이 다른 신앙의 삶을 살아갈 때에, 내가 지금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까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사랑입니다. 남들과 다 똑같은 사랑의 모습이 아니라, 차원이 다른 사랑입니다. 그럼에도 한편 우리에게 이러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 내 안에 임재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신 사랑으로, 차원이 다른 사랑의 모습을 행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이어서 45절에 말씀하시죠.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여기 보면 두 가지가 나눠집니다. 하나는 이렇게 행함으로, 즉 원수를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너희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 인정받는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 주신다.”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씀합니다.
내 기준으로 바라보면서 “저 사람은 원수, 저 사람은 악한 사람, 저 사람은 불의한 사람.” 심지어 “저런 사람은 구원 받으면 안돼.” 이렇게 정죄하고 잣대를 가지고 재단하기에 앞서 하나님의 사랑 받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무언가 다툼이 생겼을 때에, 그것이 가정이든, 교회든, 어떤 공동체의 어떤 모임이든간에, 다툼과 갈등이 생겼을 때에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부부가 원수가 아니고, 가족이 원수가 아니고, 교인들도 원수가 아닙니다.” 원수는 우리를 서로 싸우게 만드는 사탄마귀입니다. 갈등과 다툼이 생기면,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사탄마귀부터 쫓아내야 합니다.
격이 다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판단 기준을 넘어서, 조금 마음에 안들어도, 조금 삐그덕거려도, 조금 이해가 안 된다고해서 원수처럼 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향해 사랑을 베푸신 것처럼, 좀 더 넓은 마음으로 품어안는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사랑으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합니다.
골로새서 3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앞선 12절과 13절에는 이 모든 것이 무엇인지가 나옵니다. “긍휼과 자비와 겸손와 온유와 오래 참음, 그리고 용서”. 이 모든 것이 다 있을지라도, 거기에 사랑이 더해져야 온전함을 이룰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볼까요? 마지막 48절, 오늘 사랑에 대한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 온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보면, 명령형입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을 닮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의 온전하심을 이루어야만 하는데, 그게 지극히 당연한 것인데, 어떻게 가능한가요? 오직 사랑으로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앞서 46절과 4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차근차근 설명하십니다. “너희들이 너희를 사랑하는 자들만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세리가 하는 정도의 사랑, 이방인이 하는 정도의 사랑 말고, 차원이 다른 사랑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사랑의 사도라고 불리우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요한은 요한일서 4장 1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요한이 말하는 온전한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목숨까지 바친 그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죄로 인한 사망의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닌, 구원의 소망과 영생의 기쁨만이 있을 뿐입니다. 온전한 사랑이 영적 두려움을 내어쫓고 영원한 기쁨을 주십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온전한 사랑, 하나님의 독생자를 내어 주신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그리고 그 사랑 받은 자로서, 내 삶 가운데 내가 실천해나가는 사랑입니다. 이 모든 것이 더해지는 것이 온전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함으로 이루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