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61) 고난 받는 종의 노래 <이사야 53:1~12>
유대인들도 메시야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는 않죠. 그 이유가 무엇인가요? 유대인학자가 말합니다. “유대민족은 전통적으로 미천한 사람, 종으로 오셔서 죽는 겸손한 메시야를 믿지 않습니다. 대신 권세 있는 왕으로서 세상을 정복하는 고귀한 메시야를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영광의 왕이 아니라, 고난 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본문 2절 후반부에 말씀하죠.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야말로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이 땅 가운데 오셨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사야 53장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외면하고 금기하는 말씀이 되었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가장 귀하고 복된 말씀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늘 말씀을 “고난 받는 종의 노래”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 받는 종이 뭐가 기뻐서 노래를 부르겠습니까? 메시야 예수님은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을 통해 온 인류에게 죄 사함의 역사, 구원의 역사, 천국의 소망이 주어지기 때문에 영적인 기쁨으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눌 때에, 우리에게도 기쁨의 찬양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전체를 보면 “그”라는 말이 스물여덟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오늘의 주인공이 “그”입니다. 그가 누구인가요?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4절에 말씀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당한 질고가 누구의 것입니까? 그가 당한 슬픔이 누구의 것입니까? 그의 것이 아니라, 본래 우리의 것을 대신 지셨음을 말씀합니다.
이어서 5절입니다. 오늘 본문 전체의 하이라이트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 이 말씀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여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 예언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제 메시야께서 오실 터인데, 그가 까닭없는 고통을 당하고, 까닭없는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멸시를 당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게 바로 우리의 죄 때문임을, 너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이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6절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게 우리의 영적인 실존의 고백입니다. 그저 다 내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살아온 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 길의 끝은 어디인가요? 목자 잃은 양이 “각기 제 길로 걸어가면” 그 길의 끝은 어디인가요? 사자와 늑대와 이리의 입 속일 뿐입니다. 11절 중반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록합니다.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하나님의 의로운 종,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친히 십자가에 대속의 죽임 당하셨습니다. 내 죄를 대속하신 주의 십자가 사랑에 감사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의 마지막 겟세마네 기도에 그 답이 나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럼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은 무엇인가요? 요한복음 6장 40절에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이에 대해서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에 죄악이 들어오는 그 순간부터 영적인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징계의 순간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영적 싸움에서의 승리를 선언하십니다.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뱀의 후손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 여기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통을 당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0절 중반에 예수님의 죽으심을 가르켜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속건제물은 단순한 속죄의 제물과는 조금 다릅니다. 속건제물은 부채를 갚거나 피해보상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죄로 인한 하나님의 깨어진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속건제물이 되셨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원받은 우리들, 주의 자녀된 우리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무엇인가요? 십자가 보혈을 향한 믿음, 구원의 확신, 나아가 주의 사랑 전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세상 가운데 함께 이루어갈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셔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그리고 대제사장이 예수님의 메시야됨을 아예 몰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의도적으로 외면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사고 방식 속에서의 메시야의 이미지 때문입니다. 메시야께서 오셔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실 것을 기대하지만, “주여! 이 모습으로 오시옵소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에 흠을 내지는 마십시오.” 그러다보니,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는 공공연하게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 저 모습은 우리가 원하는 메시야가 아닙니다.” 지금 저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이 메시야인가? 아닌가?” 이건 중요치 않았습니다.
본문 마지막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시고,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할 것이라 말씀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몫을 받게 되는 존귀한 자가 있습니다. 강한 자가 있습니다. 누군가요?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 구원받은 우리들입니다. 영적 싸움에서 승리한 우리들입니다.
마치 왕이 전쟁터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장수들과 함께 전리품을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영적 전쟁에서 십자가 보혈의 능력으로 창세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에 동참한 자, 하나님 예비하신 부활의 영광과 천국의 기쁨과 더불어 삶의 축복을 전리품으로 거두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