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3 ; 과학자- 모리스 윌킨스 (Maurice Wilk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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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13 ; 과학자- 모리스 윌킨스 (Maurice Wilkins)

일요시사 0 764 0 0

<1916년 12월 15일~2004년 10월 5일>



생명 핵심 DNA 분자구조 발견해 노벨상 받아 


모리스 윌킨스는 노벨상을 받아 ‘원자폭탄 발명의 연루자’라는 오명을 

한꺼번에 씻어냈다. 많은 과학자가 찬사를 보냈다. 

먼 우주에 관한 것도 아니고 하찮은 미물에 관한 연구도 아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생명구조를 분석해 

인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생명의 신비’를 푸는 열쇠 가운데 하나가 DNA(데옥시리보핵산, deoxyribonucleic acid)다. DNA는 ‘유전형질을 전달하는 복잡한 유기화학적 분자구조’라는 뜻이다. 

 

DNA라는 단어가 요즘 들어 사람들 관심을 끌고 있다. 일상에서도 ‘친자관계를 확인하려면 DNA 조사를 하면 된다’거나, ‘DNA 조사 결과 범인으로 판명됐다’는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여섯 살 때 부모 따라 영국에 이민 가

 

이 어려운 단어를 널리 알려준 사람이 뉴질랜드산 DNA를 가진 모리스 윌킨스이다. 그는 1916년 12월 15일 해스팅스에서 100여km 떨어진 곳에 있는 퐁가로아(Pongaroa)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의사였다.

 

모리스 윌킨스는 여섯 살 때 부모를 따라 영국행 배에 올랐다. 버밍햄에 도착한 그는 킹 에드워드 스쿨(King Edward’s School)을 마치고 케임브리지에 있는 세인트 존스 칼리지(St John’s College)에서 물리학을 전공했다. 1940년 버밍햄대학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지내다가 군대에 들어갔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우수한 과학 인력이 필요하던 때였다.

 

영국 군대에서 복무하던 중 모리스 윌킨스에게 또 다른 명령이 떨어졌다. 미국이 주도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에 함께하라는 것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히틀러가 이끄는 나치에 대항해 고성능 살상 무기를 만들어 한꺼번에 적군을 쳐부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맨해튼 프로젝트에서 나온 결과물 가운데 하나가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원자폭탄이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폭탄 두 개는 수천만 목숨을 앗아간 2차 세계대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모리스 윌킨스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쟁이 끝난 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민간인들(일본 사람)에게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에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원자폭탄 기회로 반핵운동에 앞장서

 

모리스 윌킨스는 원자폭탄 개발에 연루돼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2년 동안 원자폭탄에 쓰는 방사선 동위원소를 질량분광기로 분리하는 일에 참여한 것이 문제였다. 과학자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한 일이 죄 없는 사람들을 숱하게 죽이는 참혹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모리스 윌킨스는 이 일로 반핵운동에 앞장섰다. 과학은 인류에 유익한 목적으로만 쓰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뼈아픈 경험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모리스 윌킨스는 영국으로 돌아온다.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University of St. Andrews)에서 잠깐 물리학 강사로 일하던 그는 킹스 칼리지(King’s College)로 옮겨 1955년 의학연구부 생물물리실 부소장 자리를 맡았다. 연구실은 젊은 인재 네 사람이 마음껏 연구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영국 생물 물리학자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1916~2004), 미국 유전학자 짐 왓슨(Jim Watson, 1928~)과 그때만 해도 눈에 띌 정도로 드물었던 여성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Rosalind Franklin, 1920~1958)이 연구실 동료였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연구 도중 안타깝게도 암으로 죽는다. 연구활동을 하면서 엑스레이에 너무 많이 노출된 것이 원인이었다. 그때 나이 겨우 서른일곱 살이었다. 몇 해 뒤 자신이 노벨상의 주인공이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뛰어난 여성과학자’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62년 노벨 생리.의학상 공동 수상

 

1962년 모리스 윌킨스를 포함해 세 사람의 과학자가 공동으로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DNA의 분자구조를 발견한 공로였다. 뉴질랜드가 낳은 뛰어난 과학자, 모리스 윌킨스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화약제조로 상상할 수 없는 돈을 벌었지만 화약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끔찍한 현실을 보면서 참회하는 마음으로 자기 이름을 따 노벨상을 만들었다.

 

모리스 윌킨스 역시 지난날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했다는 사실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는 점에서 노벨과 닮은 꼴 과학자였다. 자기 연구가 다른 목적으로 쓰일지 몰랐다. 2차 세계대전 때만 해도 영국 같은 자본주의 국가들은 어떻게 해서든 나치와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을 물리쳐야만 했다. 여기에는 의문이 없었다. 모리스 윌킨스도 마찬가지였지만 결과는 인류 역사에 치명타를 준 꼴이 됐다.

 

모리스 윌킨스는 노벨상을 받아 ‘원자폭탄 발명의 연루자’라는 오명을 한꺼번에 씻어냈다. 많은 과학자가 찬사를 보냈다. 먼 우주에 관한 것도 아니고 하찮은 미물에 관한 연구도 아닌,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의 생명구조를 분석해 인류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사람 통제 벗어난 과학은 안돼” 주장

 

모리스 윌킨스는 킹스 칼리지에서 후학을 지도했다. 1963년부터 70년까지는 분자생물학 교수로, 그 뒤 10여 해는 생물물리학 교수로 근무하다가 명예교수로 남았다. 교수로 일하는 동안 광학현미경 기술 관련 책을 펴냈으며, 과학의 사회 의무에 관한 영국학회의 회장직을 맡았다. 또 화학무기에 반대하는 러셀위원회(Russell Committee) 회원으로 일하면서 사람 통제를 벗어난 과학 발달은 피해야 한다는 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모리스 윌킨스가 어릴 때 뉴질랜드를 떠나 영국에서 평생을 살다시피 했지만 그의 삶은 늘 철부지 꼬마 시절 누린 추억으로 가득 찼다.

 “지상 낙원에서 산 것 같았다.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내 연구활동의 모태는 뉴질랜드의 푸른 자연이었다.”

 

모리스 윌킨스는 영국 런던에서 2004년 10월 5일 여든일곱을 일기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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