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62)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 <마가복음 8:27~38>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들을 향해 전하신 메시지가 아닙니다. 잘 보시면, 27절부터는 특정하여 예수님의 열 두 제자만을 향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어서 34절에 보면 “무리와 제자들”로 대상이 확장되는데, 여기서 무리도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더불어서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사람들을 뜻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정말 제자로서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순종하며 따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저 기적을 보기 위해, 떡이나 한 덩어리 얻어 먹기 위해,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 주변을 맴돈 이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도 제자가 있는가 하면 무리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정말 따라가는 자도 있고, 그냥 교회생활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주변을 맴도는 무리가 아닙니다. 그저 교회에 왔다갔다만하는, 교인에만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 모든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인 줄 믿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앞으로 자신이 당할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 중에서 본문에는 첫 번째 수난예고가 나옵니다. 그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수제자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에 합당할만한 대답을 합니다. 베드로에게 이러한 믿음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드디어 제자들을 향해 자신의 앞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포함해서 모든 유대인들은, 메시야께서 오시면 위대한 정복자가 되어서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십니다.” “주는 메시야입니다.” 이렇게 고백한 그 심중에도 이러한 위대하고 능력있는 메시야로서의 기대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전혀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이제 곧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 버린 바 될 것이다.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것까지 말씀하셨지만, 저들에게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은 들리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실 것이라는 말씀만이 귓가를 진동합니다. 본문 32절을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합니다. 예수님께서 위대한 정복자가 되셔야 하는데, 죽는다는 것이 무슨 말이냐는 겁니다.
제자들은 마치 작정한 듯이,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나올 때마다 오히려 더 세상적인 것에, 더 사람의 일에만 관심을 갖는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 땅 가운데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시는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일을 하시고자 할 때에, 제자들은 오히려 더 세상의 일을 생각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나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 기준이 나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가르켜 영적 분별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로서,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하나님 보시기에 옳고 유익이 되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나의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본문 34절입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게 무엇인가? 내 속에 있는 가시를 빼내는 것입니다. 그 가시가 무엇인가요? 내 헛된 바람, 욕심, 이기심, 분노와 탐욕, 죄악의 본성... 셀 수 없는 수많은 인간의 연약함들이 다 가시입니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보호하려고 그 가시를 기릅니다. 그러다가 그 가시에 내가 찔려버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이겁니다. “네 속에 있는 가시를 버려라. 그래야 비로소 너 자신을 부인하고,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비로소 너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수 있게 될 것이다.” 자기 부인은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아직 버리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배와 그물은 버렸을지 몰라도, 내 세상적인 생각까지 버리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손에 들고 있는 외적인 것은 버렸을지 몰라도, 아직 내 속에 있는 내 주장까지는 버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 내가 버린 배와 그물보다 더 많은 예수님의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우리 안에도 혹 그런 생각과 기대가 있지는 않은지요. 나 스스로 제5의 복음서를 만들어 놓고, 내 것을 버린다고는 하였지만, 실제로는 내 마음을 비우지 못한 채, 내 안에 있는 수많은 가시들로 나를 찌르고, 다른 사람을 찌르고, 예수님까지 찌르고 있지는 않은지요. 이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이전의 생각들, 관점들, 욕심들을 내려놓는 것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내 뜻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전적으로 순종하는 것. 그럴 때 비로소 내 안에서 나를 찌르는 가시가 사라지고, 주님께서 내 안에 주인으로 임재하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면 이제 비로소 나의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라, 나의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우리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나의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에서의 봉사와 헌신이든지, 사업장이나 직장에서의 모습이든지, 가정에서 드러나는 행동이든지, 매 순간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나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내 모든 삶의 흔적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새겨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로서, 날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삶의 자리 속에서,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나의 십자가를 감당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내 믿음의 삶을 자랑해야 합니다.
저는 사랑하는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 성도님들에게 자랑거리가 아주 많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 혹 지금 당장은 그렇지 못하더라도, 그 자랑이 끝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혹 지금은 힘겹고 어려운 일이 있을지라도, 주를 향한 믿음만큼은 계속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 지금 당장은 낙심되고 답답한 일이 있을지라도, 그래도 “내가 예수 믿는 자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랑은 계속 넘쳐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잘 되는 것 같을 때에는 “주님! 사랑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감사함으로 고백하다가, 조금 어려운 일만 닥치면 “주님! 이게 뭔가요?” 원망하고 낙심하는 모습, 그런 일희일비하는 신앙의 모습은 내 믿음의 삶을 자랑하는 것이라고 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입니다.
본문 38절에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끄러워하면, 하나님께서도 나를 부끄러워하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 당당하게 내가 믿는 자라고 선포하고 증거하는 자는 하나님께서도 자랑스러워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에, 때로 고난이 닥치고,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사탄아! 내 뒤에 물러가라.” 담대하게 선포하며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고난이 변하여 영광이 되어지는 역사를 이루어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랑스럽게 여기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내 믿음의 삶을 자랑하고, 주님 기뻐하시는 삶을 사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