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사-한일수 박사] “영원한 코리안의 친구여!”

교민뉴스


 

[추모사-한일수 박사] “영원한 코리안의 친구여!”

일요시사 0 731 0 0

() 로이 윌슨(Roy Wilson)을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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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 년을 뉴질랜드 한인들과 인연을 맺고 동고동락하며 지내왔던 로이 윌슨 씨가 작고하셨다. 우리 한인들은 오랫동안의 우정을 유지하며 한인들을 사랑하고 우리 한인 사회가 번영하기를 누구보다도 기원해 마지않았던 우리의 소중한 키위 친구 한 분을 잃게 되었다.

한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국가였고 좁은 국토의 한계를 벗어나 무궁한 자원의 보고인 해양으로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뉴질랜드는 남태평양의 어업 전진기지이다. 자연히 한국의 원양어선들도 뉴질랜드에 정박하여 어업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1954년에 뉴질랜드로 이민 온 윌슨 씨는 웰링턴 부두에 위치한 포스트 뱅크(Post Office Bank, 오늘날의 키위 뱅크와 유사)에 근무하면서 배에서 내리는 원양 어선 선원들과 마주치게 되었고 선원들의 도움 요청에 선뜻 호의를 베풀면서 한국인들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이때가 196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선원들과 윌슨 씨와의 인연은 후임 선원들에게도 인계되어 친구 관계가 계속되었다. 그들은 선박과 윌슨 씨 집을 상호 방문하며 음식을 교환하고 색다른 문화를 체험하기도 하였다.

40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던 윌슨 씨는 원양 어선 선원과의 인연이 계속되자 한국의 젊은 아가씨와 결혼하게 되는 행운을 맞이하기도 하였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JP로 교민 봉사를 계속하고 있는 변경숙 씨를 부인으로 맞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게 되어 복을 받은 셈이다.

변경숙 씨는 20대에 40대 후반의 서양인 신랑을 만나 언어, 음식, 문화 충격 등 극한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가정을 이끌어왔고 윌슨 씨 말년에는 고인의 손발이 되어 헌신적인 노력으로 보필하여 한국인의 주부상을 여지없이 실천해주었다.

뉴질랜드 한인 사회가 아주 취약했던 시절 원양어선 선원들이나 유학생들은 어려움을 토로할 친구가 필요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키위 친구가 절실했던 시절 윌슨 씨는 좋은 일, 힘든 일 가리지 않고 함께해 주었다. 웰링턴에 본부가 있던 뉴질랜드한인회(현 웰링턴한인회) 시절에는 한인회 재무 일을 맡아 한인회 살림을 이끌어 가느라 고초를 겪기도 했다

1992년에 오클랜드로 이사 온 윌슨 씨는 당시 급성장 물결을 타던 한인 사회의 어려웠던 일들을 도와주고 한인 사회의 여러 행사에도 참여하여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였다. 본인 자신이 시니어(Senior)가 된 후에는 브라운스 베이 시니어 클럽 회장을 맡아 불편한 몸을 이끌고 한인들과의 교류를 계속하여 왔다.

이제 윌슨 씨는 떠났다. 그러나 윌슨 씨가 남긴 우정은 영원히 우리 한인들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쉴 것이다. 우리 한인들은 고인의 뜻을 받들어 더욱 열심히 살아갈 것이고 뉴질랜드의 모범 시민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다.

로이 윌슨 님이시어, 편히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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