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1. 우연한 만남

교민뉴스


 

개척자들,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다.; 1. 우연한 만남 <변경숙>

일요시사 0 811 0 0

일요시사는 700호를 기념하여

'뉴질랜드 이민 열전'을 실으려 한다. 


50여 년 뉴질랜드 이민 역사의 초창기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 가운데 뒷세대에게 기록을 남겨도 좋을 만한 사람을 선정했다. 

그 공과(功過)는 보는 사람에 따라 충분히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사람들은 먼저 살았던 사람의 삶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기 마련이다. 


그 삶이 위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한 시대를 살아온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그 시대를 되돌아보는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독자들의 관심과 애독을 바란다. 

                      

                                   <편집자>

 

 

 

변경숙 (Kyungsook, Wilson)

 

사소한 우연이 사람의 앞날을 얼마나 바꾸어 놓는지. 인생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얼마나 벌어지는지. 그런 것을 운명이라고 한다면, 그 운명이라는 것이 얼마나 우연에 좌우되는 것인지. 운명이라는 것이 때로 얼마나 우연처럼 보이는지.

 

우연으로 일어난 일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바뀌어져 있을 때, 그것은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런 우연이 일어난 것 자체가 운명 속에 담겨져 있었던 것인지......

 

우연한 만남

 

경숙은 자유로웠다.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랬고, 책임질 이유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저 그런 사람이 없다는,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그렇게 썼다.

 

 

경숙아, 이를 어쩌면 좋으니. 남편에게서 또 편지가 왔는데 말이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래. 총각이라지 뭐니. 여기서 그 사람과 결혼할 아가씨를 찾아보라는 거야. 벌써 몇 번째인지 몰라. 꼭 찾아내라는 거야.

경숙이 찾아갔을 때, 친구는 임신 중이었다. 원양어선의 선장인 아들이 외국으로 나가자 시부모는 자기들의 임무인 듯이 며느리를 단속했다. 시장에도 못 가게 했고, 대문 밖에 나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젊은 며느리를 집안에 거의 가두다시피 했다.

주말마다 경숙은 그렇게  친구를 찾아갔고, 친구 역시 주말마다 찾아오는 경숙을 기다렸다.

친구의 남편은 뉴질랜드 근해에서 조업하는 원양어선의 선장이었다. 친구는 자기 남편을 송선장이라고 불렀다. 송선장은 배가 웰링턴에 입항할 때마다 이곳에 좋은 백인이 있는데 한국에서 적당한 사람을 소개하라고 닦달하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닦달은 경숙에게로 이어졌다.

변경숙은 웃었다.

한국선원들에게 도움을 주는 좋은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어떻게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는, 어딘지도 모르는 나라에 사는 남자와 결혼하겠다는 사람이 있을까. 거기다 사람들은 국제결혼을 그리 너그럽게 보지 않았다. 설사 국제결혼을 원하는 여자가 있다한들 두 사람을 어떻게 소개할 것이며,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지 전혀 막막한 상태였다. 어떻게 보면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적당한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아니 그런 사람을 찾아내라는 편지는 줄줄이 날아왔다.

경숙아. 네가 답장을 좀 써 보내라. 너, 공부를 잘 했으니까 영어도 잘 할 것 아니니?

내가 아무리 말해봐야 소용없었어. 적당히 써 보내자. 그런 여자가 어딨니? 귀찮기도 하고 말이야.

변경숙은 그러마고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친구의 남편은 바다에 나가 있을 테니까 그 남자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여기서는 얼굴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서양 사람과 결혼할 아가씨를 찾을 수 없다는 편지를 쓰기로 했다.

변경숙은 영어시간을 떠올렸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려면 먼저 격식에 맞게 인사를 하고, 보내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힌 다음 내용을 쓰고, 그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는 것이라고 배웠다.

경숙은 자유로웠다. 당사자가 아니어서 그랬고, 책임질 이유가 없어서 더욱 그랬다. 그저 그런 사람이 없다는,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다는 내용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그렇게 썼다.

먼저 안녕하시냐고 인사했고, My name is  Byun Kyoung Sook라고 썼다. 그리고 대단히 미안하지만 서양인과 국제결혼을 하려는 사람을 찾을 수 없다고 썼다.

 

 

답장이 오다 

 

그리고 한동안 잊고 지냈다. 삼 개월이나 지났을까, 뉴질랜드에서 편지가 왔다.

노란 국제우편용 봉투에는 깨알 같은 아니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글씨로 쓰여진 여섯 페이지의 편지와 백인 남자의 사진이 함께 들어있었다. 도저히 읽을 수 없는, 내용을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필기체로 쓰여진 영문 편지였다.

웃기는 남자 아니니?

경숙과 친구는 읽을 수 없는 편지를 보며 마주 웃었다. 편지 중간에 쓰여진, 로이 윌슨이라는 이름을 거꾸로 쓴 한글 때문에 더 크게 웃었다. 거절한다는 편지를 받고 자신의 사진을 보내는, 정말 웃기는 남자였다.

삼십 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영화배우 같지는 않았지만 단정한 용모였고, 웃는 얼굴이 보기 좋았다.

곧이어 송선장에게서 편지가 왔다. 경숙에게 보내는 편지는 아니었지만 남자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들어있었다. 뉴질랜드의 국립은행에 근무하는 공무원이며, 항구에 드나드는 한국선원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거기에 이어지는 선장의 칭찬은 끝이 없었다.

그런 사람을 혼자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아까워서 자신이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송선장은 자신이 아는 사람이 있으면 당장 결혼하라고 말하고 싶다고,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고, 책임질 수 있다고,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물론 경숙에게 소개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편지의 행간에는 경숙에게 권유하는 기색이 여기저기 드러나 있었다.

하도 여러 번 들어서일까,

사진 속의 단정한 용모가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단순한 호기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외국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일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웃으면 웃을수록 경숙은 마음이 흔들렸다. 왜 그런지 알 수 없었다.

결혼이 무엇일까. 사랑이 없어도 괜찮을까. 사랑이라는 것은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아지랑이 같은 것 아닌가. 사랑은 결국 본인에게 속하는 것일 텐데. 그래서 더욱 내가 사랑할 사람은 내가 선택해야 되는 것 아닐까.

대학생이 되어서 만난 남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교내 방송을 하면서 알게 된 남자였다. 자격이 부족하거나 못 생긴 것은 아닌데, 만나면 뭔가 통하지 않는 것 같았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래서 신발이 바닥에 얼어붙을 때까지 다투었다. 그러면서 이 다툼은 언제나 끝이 날까, 언제쯤이나 이만하면 됐다며 다투지 않게 될까를 생각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불만이었고, 무엇을 원했던 것일까.

송선장의 편지는 어떻게 생각하면 경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고, 경숙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적당한 여자를 찾아보라는 선장의 독촉은 자기 아내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경숙은 단지 그런 여자는 없다는 편지를 써 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는 마치 경숙 자신을 향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더욱 알 수 없는 것은 경숙이 자기도 모르게 편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었고, 어느 새 사진 속의 남자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변경숙은 혼자 생각했다.

정말 선장의 말처럼 그렇게 좋은 사람이고 그렇게 친절한 사람이라면 한번 이야기를 해봄직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아니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기울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사범대학으로 진학하여 교사가 되었으면 하는 아버지의 바람을 뿌리치고 유아교육과에 진학했을 때처럼, 전공수업보다는 교내방송국 PD로서의 역할에 몰두했던 것처럼, 졸업 후 어린이들을 돌보는 일보다는 어린이를 위한 잡지를 만드는 일에 매진했던 것처럼, 좀 더 넓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부모의 슬하를 떠나왔던 것처럼 경숙은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삶에 끌렸다.

 

 

 

답장을 쓰다

 

그래서 답장을 썼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로는 마음을 전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번에는 한글로 썼다. 본인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송선장이 빠짐없이 전해줄 것이었다.

당신에 대해서 그리고 당신의 직업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당신이 그리는 장래에 대해서 좀 더 알고 싶다고 썼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였다. 나의 결정이 올바른 것일까를 생각하면서 봉투에 넣지 못했다. 사진을 보내도 괜찮을까를 고민하면서 한참동안 핸드백에 넣고 다녔다.

무더웠던 여름은 더디게 지나갔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낙엽이 지고 있는데 햇살은 눈부셨다. 곧 추워질 것이었다. 퇴근길이었다. 걸음이 다다른 곳에 우체국이 있었다. 변경숙은 편지를 부쳤다. 속으로 답장은 기대하지 않는다고 몇 번이나 다짐했다.

낙엽이 질 즈음에 답장이 왔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합친 것 같은 편지였다.

거기에는 자신은 1932년 영국에서 태어났으며 부모와 함께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다고, POST BANK에서 근무하고 있는 남자라고, 결혼을 하게 되면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 일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변경숙은 1932년을 생각했다. 경숙이 태어나기 20년 전이었고, 어머니가 태어난 해였다. 사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었다. 기껏해야 경숙보다 대여섯 살 위가 아닐까 여겼다. 서양 사람들은 나이보다 젊게 보이는 것일까.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친구가 남편인 송선장의 말을 전했다. 송선장은 속았다고 펄펄 뛰었다. 남자의 나이 때문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남자이기라도 한 것처럼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던 송선장이었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 줄은 몰랐다고, 나이가 그런 줄 알았으면 나서지 않았을 것이라며 사과했다. 어딘가에 자식들을 감추어 두고 있는 홀아비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송선장은 경상도 남자의 싸우는 듯한 억세고 투박한 사투리로 말했다.

없던 일로 하자. 큰 일 날 뻔 했다. 

변경숙은 그런 송선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얼마 전까지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다가 나이를 알고 나자 하룻밤 사이에 사기꾼이니 홀아비니 하면서 사람을 매도하는 송선장이 이상하게 보였다. 남자의 나이를 알아보지도 않고 섣불리 결혼 운운했던 것은 엄연히 송선장의 잘못이었고, 자신의 잘못을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로 덮으려고 하는 태도를 경숙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욱이 먼 나라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나쁜 사람이 되어버린 그 남자가 가여웠다. 

변경숙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은 채 당신이 좋다면 나는 괜찮다라는 편지를 보냈다. 단순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일에 대한 반발심만은 아니었다. 한 번 두 번 어쩌면 사람 좋은 선장의 오지랖으로 비롯되었던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그리고 어찌해야 좋을지를 고민하는 동안, 단정한 남자의 얼굴이 자기도 모르게 경숙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후, 사랑하는 나의 경숙에게, 나는 경숙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로이로부터 라고 쓰여진 편지가 왔다. 처음 친구로부터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이후 세 통의 편지를 보냈고, 세 번째 답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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