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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4) 끝자락에서 <시편 46:1~11>

일요시사 0 100 0 0

오늘의 중심 말씀은 5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자, 과연 이 새벽이라는 시간이 어떤 시간일까요? 우리 성도님들은 새벽 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결론적으로 이 새벽은 “누구에게 있어서나 참 쉽지 않은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 새벽에 수많은 역사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본문에도 보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밤을 지새고, 새벽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을 찬양합니다. 그렇기에 본문에서 새벽은 희망찬 새힘의 새벽이 아니라 두려움과 낙심과 절망과 아픔의 끝자락에서 잠 못 들다가 뜬눈으로 맞이한 그 새벽을 뜻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그 새벽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끝자락에서.” “끝자락” 그것은 앞이 안 보이는 막막함입니다. 일상에서는 잠깐 눈만 감았다 떠도 저 위로 해가 솟아오르는데, 내 삶의 현실에서는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여전히 밤, 여전히 어둠, 여전히 갈길 몰라 헤매는 이 끝자락에 선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이 끝자락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려움의 밤을 지난 그 끝자락에서...” 본문의 표현을 따르면 “어둠을 지난 그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내 삶의 어둠을 지난 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내 학업의 끝자락에서, 내 사업의 끝자락에서, 내 이민생활의 끝자락에서, 내 모든 삶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감사함으로 고백하는 이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끝자락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일으키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 번의 “셀라”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중에 두 번째, 세 번째 셀라가 나오는 7절과 11절에 공통으로 나오는 후렴구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이 후렴구에서 사용된 야곱이라는 이름은 보통 한 사람이 아닌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거저 받은 게 아닙니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그야말로 수많은 삶의 위기와 우여곡절의 시간을 보낸 인물입니다. 본 집에서, 그리고 삼촌의 집에서까지 야반도주 한 야곱은 얍복강에 이릅니다. 이제 얍복강 하나 건너면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야곱은 작은 개울 수준의 얍복강을 쉽게 건너지 못합니다. 심리적인 경계선입니다. 이방 땅과 가나안 땅, 지금껏 내가 도망쳐 나와서 살던 땅과 자신을 죽이려고 다짐했던 형 에서가 있는 땅으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앞에 주저 앉습니다. 다른 모든 가족들과 하인들, 모은 가축들과 재산을 다 건너보내고 야곱은 홀로 주저 않습니다. 그 때의 모습을 창세기 32장에 24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 말씀을 보는데, 눈물이 왈칵 올라 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우리 성도님들! 이런 경험 있으시잖아요. 홀로 얍복강에 주저 앉은 야곱과 같은 상황. “목사님! 지금이 바로 그 때에요.” 하실 분도 계실 것이고, “그래. 내가 그 때 그 사건 속에서, 그 상황 속에서 똑같은 경험을 했었지.” 떠오르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니까, 그게 끝이 아닙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야곱이 홀로 주저 앉았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나서 야곱의 허리춤을 붙잡고 싸움을 걸어옵니다. 그리고 씨름을 하는데, 누가 이깁니까? 야곱이 이기는 거예요. 우리는 보통 생각합니다. “야곱이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다.” 더 나아가 “야곱의 간절함으로 천사와의 씨름에서도 이겼다.” 정말 그럴까요? 아무리 인간이 악바리처럼 달려든다고 하나님의 천사를 이긴다는 게 가능할까? 지금 야곱이 그렇게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과연 있기나 했을까? 

 지금 얍복강에 앉아 있는 야곱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야곱은 힘이 다 빠진 상태입니다. 뭔가 의욕을 가지고, 악바리 같이 덤비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가족들, 재산, 다 건너보내고 혼자 앉아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야곱이 얍복강에 홀로 앉아 무엇을 했을까? 아마도 지난 날 자신의 삶을 돌아봤겠죠. 정말 내가 그렇게 바라던 축복이 과연 이런건가? 축복은 받았죠. 아내가 넷이고, 자녀들이 열 두명이 넘고, 가축이 엄청나고... 축복은 받았어요. 그런데 지금 현재 야곱은 축복으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걱정과 염려와 회환 가운데...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그 때 하나님께서 천사를 야곱에게 보내시는 거예요. 그냥 주저앉은 야곱, 지금 야곱은 간절히 기도하는 그것 자체가 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강제로 허리춤을 붙잡아 일으키는 거예요. 영적으로나 삶적으로 다 지쳐서 후회와 낙심 가운데 있는 야곱을 붙잡고 흔드는 겁니다. 밤새도록.. 날이 밝기까지... 그리고 새벽녘에 야곱을 떠나려고 할 때에, 그제서야 야곱이 정신을 차리는 거죠.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 또 축복? 그 축복 때문에 지금 여기까지 왔는데?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축복하십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그렇게 가지려고 했던, 그런 축복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축복을 주십니다. “이스라엘”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 하나님을 이겼다는 것은 이제야 비로소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룰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고, 사람들을 이겼다는 것은 헛된 세상적인 것만 바라보던 자신, 낙심하여 주저 앉은 자신과도 싸워서 이겼다는 겁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절망의 끝자락에서 홀로 남은 것 같았지만, 하나님은 그 때 야곱에게 찾아오십니다. 천사를 보내시고, 붙잡고 뒤흔들어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시고, 강제로 이기게 하시고, 그 밤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때로 홀로 남은 것 같은 답답함이 있을지라도, 찾아오시는 하나님, 새롭게 일으켜주시고,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케 하시는 그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끝자락에서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십니다. 

 

본문 8절에서 11절의 세 번째 셀라의 말씀을 보면 마치 홍해 앞에서의 기적의 순간을 그리고 있는듯한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거쳐 모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까지 이르게 하십니다. 홍해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진퇴양난의 상황이었습니다. 생명의 끝자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비규환의 현실로 인해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모세는 백성들을 향해 이렇게 외칩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두려움과 공포가 극에 달한 절체절명의 위기속에서 모세의 처방은 단 하나였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으라.” 본문 10절에도 똑같은 고백이 나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여러분! 내가 뭔가를 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죠? 가만히 있어야죠. 내가 이 일을 해결 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죠? 가만히 있어야죠. 지금 홍해가 내 앞에 있어요. 뒤에서 애굽 군사가 쫓아와요. 갈 때가 없어요. 어떻게 합니까? 가만히 있는 거예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의 고백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알지어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움의 밤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모세의 말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순종함으로 가만히 있는게 아니라,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의 끝자락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셨습니다. 오늘 홍해와 같은, 애굽 군사와 같은 엄청난 문제로, 정말 강제적으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밤, 그 끝자락에서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나는 가만히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일하시고, 승리케하시는 은혜를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끝자락에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십니다. 

 

본문 4절에서 7절에 나온 두 번째 셀라의 찬양은, 하나님께서 그 성에 거하실 때에 안전함 가운데 거할 수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시편 47편의 배경은 열왕기하 19장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 때에 앗수르와의 전쟁 이야기입니다. 앗수르는 예루살렘을 제외한 남유다 전체를 초토화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면서 히스기야에게 항복을 강요합니다. 이 때에 히스기야 왕은 이 모욕적인 서신을 하나님 앞에 펼쳐놓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열왕기하 19장 19절입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 히스기야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구원의 역사를 베푸십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만 5000명을 다 치셔서 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산헤립은 자기 고국으로 돌아갔다가 반란의 칼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앗수르가 쳐들어 왔을 때 남유다는 절체절명의 위기였습니다.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냥 하나님 앞에 나와서 기도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쉬운 말로 하나님께 이르는 겁니다. 그럴 때에 기도가 바뀌어집니다. 오늘 5절입니다.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저 앞에 있는 18만 5천명을 향한 두려움의 시선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통한 담대함의 시선으로 바뀌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새벽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의 그 새벽은 그냥 자다가 일어난 아침으로서의 새벽이 아니라, 생명의 위기 앞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고 맞이한 끝자락인 것입니다. 히스기야가 기도했던 고백은 그 벼랑끝과 같은 내 삶의 끝자락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신다는 그 확신이 담긴, 체험적인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지금도 끝자락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한 분들이 계실지 모릅니다. 주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지만, 언제부터인가 무너져 버린 내 신앙적인 끝자락이 있습니다. 주어진 삶의 양상만 달랐을 뿐, 야곱도 그 끝자락에 서 있었고, 홍해 앞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끝자락에 서 있었고, 히스기야도 그 끝자락에 서 있었습니다. 저들은 모두 다 두려움과 절망과 낙심의 밤을 지나 잠못 이룬 새벽, 그 끝자락에 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결과는 해피엔딩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했나요?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기에,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셨기에,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셨기 때문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오늘 시편기자는 저들이 맞이한 새로운 소망과 승리의 기쁨을 찬양하고 있는 거죠.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이제 우리를 향해 동일한 믿음의 고백을 요구하십니다. “나의 인생의 끝자락, 그 새벽에도 하나님께서 도우실 줄 믿습니다.” “끝자락에서...” 오직 주님을 의지함으로 나아가는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우리 모든 청년들과 학생들에게, 우리 모두의 앞길에, 하나님께서 찾아오시고, 붙잡아 일으키시고, 승리케 하시는 역사가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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