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1;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 4장 1-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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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1;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 4장 1-5절 )

일요시사 0 1122 0 0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구나

2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오는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3 네 입술은 홍색 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4 네 목은 무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방패 천 개,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5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어린 사슴 같구나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한 솔로몬 왕의 찬가다. 앞의 1장 6절에서 술람미 여인은 자신을 이렇게 표현했다.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이과도 같구나” 검은 피부도 아름답다 하시고, 사막의 모래바람에 시달려 낡은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왕의 장막과도 같다고 인정하시는 주님이시다. 온갖 죄로 검게 물들고, 거친 삶으로 찌든 인생들도 주 안에서는 모두 아름다운 술람미 여인이다. 


검고 게달의 장막 같은 술람미 여인이 아름다운 것은 왕의 사랑을 알고 왕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깨끗하고 고와서가 아니다. 주의 사랑을 알고 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검은지, 자신의 삶이 게달의 장막처럼 인생의 모래바람으로 얼마나 낡고 지친 모습인지를 아는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더욱 더, 아니 오직 주님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자들이다.


아가 3장 9절에서는 그들을 레바논 나무에 비유하고 있다. 나무는 땅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하늘을 향해 자라나간다. 그리스도인들도 육신은 땅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하늘에 소망을 두고, 주의 사랑과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레바논 나무는 나무 중에서도 가장 귀한 나무로 알려져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을 이처럼 귀하게 여기신다. 시 16:3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부모가 자식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이 자라나는 모습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보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이 신앙적으로 성장해나가고 성숙해지는 모습과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하신다.  


아가서 4장 1-5절의 말씀은 이런 성도들의 특징을 술람미 여인의 몸의 아름다움을 통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솔로몬 왕은 술람미 여인의 일곱 가지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 중에서 “네 눈이 비둘기 같다”는 말씀 안에 나머지 내용들도 다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네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하였다. 비둘기 같은 눈이란 어떤 눈일까? 


비둘기 하면 “순수하다, 순결하다, 온유하다, 겸손하다, 평화롭다” 이런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러므로 비둘기 같은 눈이란 간교함이나 거짓이 없는 순수한 눈이다. 세속에 물들지 않은 순결한 눈이다. 완고하고 강퍅하지 않은 온유한 눈이다. 교만하지 않은 겸손한 눈이다. 시기와 질투와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눈이다. 


눈은 사람의 마음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 위에 임하셨다.  비둘기 같은 눈은 예수님 같은 마음이다. 


그런데 보다 본질적인 것이 있다. 단순히 예수님처럼 순결하고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먼저 본질적으로 자기 정체성이 분명해야 한다. 핵심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자요, 하늘에 속한 자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사는 것이다. 선을 행하라, 남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돼라, 서로 다투지 말고 화평하라,, 등등의 말들은 부처나 공자도 할 수 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다. 네가 누구인지를 알아라! 하는 것이 먼저다. 네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고 나서, 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라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마 6:22에서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셨다. 눈이 밝으면, 사물들을 바르게 똑똑히 볼 수 있지만, 눈이 어두우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고, 눈이 멀면 아예 보지를 못한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눈은 마음의 눈, 영혼의 눈이다. 


특히 주님의 이 말씀은 우리의 눈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 지에 대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주께서는 바로 앞에 나오는 19-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쌍아 두지 말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이란 사람들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그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셨다. 자신이 가장 귀하고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 땅에 있느냐, 하늘에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다. 땅의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마음도 땅에 있는 것이고, 하늘의 것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그 마음도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보물,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가 가장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할 진정한 보물은 땅에 있지 않고,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육신은 땅에 살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늘을 향해 있어야 한다. 하늘의 본향을 향해 있어야 한다. 


주님의 마음은 언제나 하늘을 향해 있었으며, 하늘의 것으로 가득하였다. 주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찾아오신 것은, 하늘의 것들을 이 땅에 사는 육신들에게 주시기 위함이셨다. 육신에 갇혀 사는 인간들에게 이 땅의 가치관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오신 것이다.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혼의 눈이 열리게 하셨다. 그 나라는 땅이 아니라 하늘 중심의 가치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는 나라,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오신 것이다. 


하늘의 것으로 가득한 사람이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이며,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바로 주님의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들은 땅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산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자기 정체성이다. 그럴 때, 우리가 비록 검고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아름답다 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의 아름다움은 완전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온전히 아는 데 있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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