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6;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 4장 16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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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26;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 4장 16절 )

일요시사 0 1134 0 0

16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열매 먹기를 원하노라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북풍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고, 남풍은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이다. 성도들의 삶 가운데 불어오는 시련과 고난과 유혹의 바람들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그렇다. 인생을 살다 보면, 차가운 북풍이 불어 올 때도 있고, 뜨거운 남풍이 불어올 때도 있다. 온갖 형태의 시련의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굴러가는 것이 인생의 수레바퀴다. 


바람이 불지 않는 인생은 없다. 인생이란 이런 바람, 저런 바람 맞아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에게 있어서, 인생에 부는 모든 바람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부는 바람이다. 설사 그것이 지독히도 사납고 잔인한 바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난 바람은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고난의 삶 가운데서, 나의 인생동산에 부는 바람은 무엇인가?


롬 5:3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하였다. 또, 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설사 고난의 바람이 심하게 불 때조차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왜 그런가? 어떤 고난의 바람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벗어나서 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고난의 바람은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큰 우산 아래에서 부는 바람인 것이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의 고백처럼 무화가나무가 무성하지 못하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고,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고, 밭에 먹을 것이 없고, 우리에 양이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합 3:17-19).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큰 우산 아래에서 삶의 고난을 이해하게 될 때, 고난도 감사와 기쁨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은 심한 고난이 닥칠 때, 주님께서 슈퍼맨처럼 크신 능력으로 모든 문제들을 단숨에 해결해주시길 바라게 된다. 


마태복음 11장에 옥에 갇힌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물어보는 내용이 나온다.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공동번역) “당신이 성경이 예언한 메시아가 정말 맞습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해서 무언가 대단히 실망할만한 일이 있었던 것이 틀림 없다.


그는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고 했다. 또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었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내리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다. 게다가 나는 그분의 신을 들고 따라갈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고백했던 사람이다. 당대에 예수님에 대해 세례 요한만큼 확실하게 알고, 또 메시아로 믿었던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지금 예수님 보고 당신이 메시아 맞습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 요한은 감옥에 약 1년 정도 갇혀있었다. 헤롯 왕이 자기 동생 빌립의 아내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일로 인해서 요한이 그를 책망하자 옥에 가둔 것이다. 불의한 자를 담대하게 책망하다 의인이 옥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가 기대하고 믿었던 메시아는 세상의 불의한 자들을 모두 심판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메시아였다. 


(사실 우리도 대부분 그렇지 않은가,, 내게 악을 행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때려 주시고, 벌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예수 잘 믿고, 선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복을 내려주시고, 인생도 잘 풀리기를 바란다.)


그런데 옥에서 제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수님은 아무래도 메시아 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세상의 불의한 자들을 멸하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분 같았다. 메시아가 오셨는데도, 자기는 억울하게 옥에 갇혀있고, 세상의 악인들은 그대로 활개치고 있다. 요한이 받은 충격과 상실감과 배신감, 좌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오죽하면, 예수님에게 “당신이 정말 메시아가 맞습니까?” 하고 물어볼 정도였겠나,,


세례 요한처럼 믿음이 확실한 사람도 인생에 불어오는 거친 바람 속에서는 흔들릴 수 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거센 풍랑에 믿음이 흔들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데, 어째서 인생이 이렇게 고달프지? 어째서 내게 이렇게 불행한 일들이 자꾸 생기지?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도대체 무슨 일들을 하고 다니셨기에, 세례 요한이 이렇게 멘붕에 빠지게 된 것일까?


마 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인간은 누구나 요한처럼 강력한 메시아를 원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강력한 POWER를 가지고 나를 지켜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나를 정말 사랑하신다면, 내게 powerful한 능력을 보여주시면 하는 바램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결코 이러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 않는다. 천국복음과 함께 조용히 다가 오셔서, 우리의 아픔을 치유해주시며, 우리의 영혼과 마음과 인생을 회복시켜 주신다.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힘으로 악의 세력을 제압하는 십자가가 아니다.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는 사랑으로 악을 이기는 사랑의 십자가다.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악에서 구원해주셨고, 지금도 우리의 상처를 싸매주시며, 상한 심령들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신다.


주님께서 달리신 골고다 언덕은 가장 심한 고난의 바람이 불던 곳이었다. 창세이래로 인류역사상 가장 모진 고난의 바람이 부는 자리가 바로 골고다의 십자가였다. 세상으로부터 버림 당하시고, 하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 당하신 자리였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그러나 그 골고다 십자가의 자리는 가장 진한 사랑의 향기가 날리는 자리였다. 우리의 메시아이신 주님의 진정한 능력은 힘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타나는 능력이었다. 견딜 수 없는 고난의 바람을 맞으면서도 우리를 품어주신 주님의 사랑이다. 


설사 인생에 어떤 고난이나 고통의 바람이 분다고 할지라도, 그 바람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더 큰 우산 아래에서 부는 바람일 뿐이다. 북풍이 불고, 남풍이 불어와도, 주님과 함께 가는 인생길은 사랑의 향기가 날리는 동산과도 같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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