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81) 믿음의 자화상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81) 믿음의 자화상 <디모데전서 1:12~17>

별 헤는 밤으로 잘 알려진 시인 윤동주의 [자화상]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내용은 간단합니다. 우물 속에 비친 한 사나이, 즉 자신을 가르키죠. 자신을 바라보면서 미운 마음이 들어 돌아서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또 그리움의 마음도 갖습니다. 불쌍한 마음도 갖게 됩니다. 여러 가지 복잡한 애증의 마음이 그려집니다. 시에 이어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자화상’이라는 그림도 있습니다. 다른 자화상은 보통 45도 측면에서 그림을 그리는데 비해서, 이 그림은 보기 드물게 정면 자화상입니다. 사실 화가들 중에서도 자화상을 잘 그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나 자신을 그린다는 게, 심리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된다고 합니다. 게다가 뒤러처럼 이렇게 정면 자화상을 그리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자 자신을 똑바로 바라본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거예요. 

  

윤동주의 자화상이나,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 하나는 글이고, 하나는 그림이지만, 둘 다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향한 마음을 글 속에, 또한 그림 속에 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님들은, 나 자신을 향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신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바울의 자전적인 고백입니다. 디모데전후서를 가르켜서 우리가 보통 목회서신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향해서 바울이 “목회자로서 이러한 모습을 가져야 한다.” 가르치고 권면하는 내용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자체는 바울 자신의 삶의 고백, 신앙의 고백이 담겨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모든 삶을 돌아보면서 마치 글을 통해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고백은 무엇인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어떤 믿음의 자화상을 그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자화상 위에 어떤 신앙의 고백을 새겨가야 할 것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감사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오늘 말씀을 시작하자마자 스스로를 돌아보며 하나님께 감사의 고백을 올려드립니다. 12절을 보십시오. 한 마디로 변화받은 자신의 삶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어서 13절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것은 예수 믿기 이전의 삶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사람들 잡아다가 옥에 가두는 일에 앞장 선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건 예수 믿는 사람들 입장에서의 바울입니다. 

  

원래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세상적으로는 금수저입니다. 하지만 오늘 바울은 그런 측면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예수 믿는 자의 입장에서 말합니다.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비방하는 자였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자였고,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을 폭행하는 자였다.” “그럼에도 내가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했기 때문이다.” 지금 바울이 변명하는 건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바울의 고백은 내가 전에는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죄악된 일을 저질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완전히 변화되었다.”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감사하는 거예요. “하나님! 나를 변화시키시사, 이렇게 귀한 사명을 맡기셨음에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무지함으로 그 악을 행하고 있었을 터인데, 주님! 감사합니다.”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에 예수님을 만남으로 삶의 변화를 경험합니다.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루어진 변화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생각, 사상, 행동, 그 모든 것을 완전히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예수님을 만났음에도 완전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고 사는 인생이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떤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말씀에 비추어서 나 자신을 바라보십시오. 오늘 바울의 고백처럼 완전한 변화를 통한 감사의 고백이 나에게 있으신가요? 내 믿음의 자화상에 예수님을 통한 변화된 삶으로 감사의 고백을 새겨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참된 승리자의 고백입니다. 


이어서 15절에 보면 다시 한 번 벅찬 감격으로 고백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기서 “미쁘다”라는 말은 “믿을만하다, 신뢰할만하다.”라는 뜻입니다. 그 믿을만한 말이 어떤 말인가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임하셨는데, 왜 오셨는가? 그 목적이 무엇인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만났는데, 심판의 주님으로 만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바울은 그 자리에 죽을 수밖에 없는, 저 지옥 끝까지 떨어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구원의 주님으로 오셨기에, 그 자체가 은혜이고, 그 풍성한 은혜를 내가 지금 입었노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15절 마지막 부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여기서 괴수라는 말에 사용된 헬라어는 “프로토스”입니다. 뜻은 “첫번째”입니다. 제일 으뜸이라는 거죠. 아니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내가 죄인 중에 최고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내가 뭔가 찔리는 게 있습니다. 그러면 당당하게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난 날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너무나 큰 죄인의 모습이었음을 깨달았음에도 움츠러들지 않습니다. 왜요? 나는 지금 죄 사함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예수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혹여라도 바울에게 지난 날의 삶에 대한 미련이나 욕심이 남아있다면, 이렇게 당당하게 “내가 죄인 중에 괴수요.” 말 할 수가 없습니다. 완전히 변화되었기에 당당하게 고백하는 거예요. 그렇기에 지금 이 고백이 참된 승리자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특별히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받은 은혜가 그만큼 풍성하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14절에 말씀하죠.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그 넘치도록 풍성한 은혜를 “내가 입었다.” 자신있게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합니다. “죄에 대한 고백, 회개의 기도, 죄 사함의 은혜.” 우리들이 신앙의 삶 속에서 늘 반복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 과정 속에 꼭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죄의 고백, 회개의 기도를 하되, 죄 사함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죄책감에 묶여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그렇기에 바울은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이 고백을 죄인의 고백으로, 죄책감에 억눌린 고백으로 올려드리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죄사함의 기쁨으로, 벅찬 감격으로 마치 자랑하듯이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그런데 내 모든 죄가 사함 받았습니다. 내가 받은 은혜가 제일 큽니다. 나는 이제 예수 안에서 승리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자화상에도 죄 사함을 통한 이러한 참된 승리자의 고백을 새겨 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인됨의 고백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전도자입니다. 동시에 목회자입니다. 저술가이기도 하고, 강연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 이전에 바울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지금 말씀을 받고 있는 우리 성도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굳건하게 세워지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바울도 오늘 이것을 강조합니다. 16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울에 대해서 오래 참으셨다는 것은 당장 바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기다리시고, 친히 만나주심으로 변화를 시켜 주셨음을 고백합니다. 이를 통해서 바울도 배웠습니다. “아! 예수님은 오래 참으시는 분이시구나.” 참으심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인됨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스스로의 체험으로 말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으로 구원을 받았고, 변화를 경험했고,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는 나로 하여금 다른 모든 사람의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다.” 그러면 바울이 어떻게 살아야됩니까? 스스로 어떻게 살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내게 본이 되신 것처럼 나도 본이 되는 삶을 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은 바울에게 본이 되셨고, 바울은 그대로 살아 디모데에게 본이 되었고, 디모데를 향해서는 “너도 그렇게 살아서 다른 사람의 본이 되라.” 그리고 더 나아가 “그 다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결론이 오늘 16절로 다시 돌아옵니다.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내가 먼저 그리스도인됨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본이 되신 것처럼, 귀한 믿음의 인물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가야만 합니다. 이를 통해 내 믿음의 자화상에도 그리스도인됨의 고백을 깊이 새겨갈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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