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어제와 오늘

교민뉴스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어제와 오늘

일요시사 0 1341 0 0

남반구의 끝자락에 이민 와 둥지를 틀고 있는 우리들이다. 

개척의지를 가지고 창조적인 노력으로 역사를 축적해 나가야 ……



민족 사학자 단재(丹齎)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가 없다”라고 갈파했다. 이를 우리 뉴질랜드 한인 사회에 대입해본다면 “역사를 잊은 뉴질랜드 한인 사회에겐 미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다행히 뉴질랜드 한인 사회에서는 이미 13년 전에 ‘아오테아로아에서 한인들이 살아 온 이야기’ 라는 부제(副題)를 달고『뉴질랜드 한인사』라는 단행본을 발간한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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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역사가 150여 년에 이르는 중국동포 및 러시아와 독립국가연합 동포 사회, 117여 년에 이르는 미국 동포 사회, 100년이 넘는 재일 동포 사회에 비하면 뉴질랜드 한인 역사는 아주 일천하다고 말 할 수 있다. 뉴질랜드에 한인 역사가 시작되기 전에 한국에서 키위 역사가 먼저 시작되었다고 말 할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UN군의 일원으로 연 6천명의 키위 병사들이 참전했고 45명이 전사하였다. 그 때 키위 병사들이 ‘포카레카레아나’ 노래를 전파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연가(戀歌)라는 이름으로 유행되었고 지금도 국민  애창곡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뉴질랜드는 한국전쟁 덕분(?)으로 경제가급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전쟁 중 한반도의 극심한 추위로 양모 (羊毛) 가격이 급등했고 뉴질랜드는 이러한 양모 수출로 톡톡히 실리를 추구했던 것이다. 



이 후 2007년까지 전개된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발자취들은 2007년 12월에 발간된『뉴질랜드 한인사』에 수록되어 있다.『뉴질랜드 한인사』는 이미 5000여 권이 배포된바 있으며 앞으로 이를 필요로 하는 기관, 단체에게는 요청에 의해 선별적으로 추가 배포할 예정이나 간단하게 그 내용을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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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한-뉴 국교가 수립되고 ‘콜롬보 플랜’에 의한 263명의 한국 영재들이 뉴질랜드에 유학했는데 뉴질랜드 정부는 학비는 물론 생활비까지 장학금으로 지불했다. 유학생들은 한국에 돌아와 1970년대 조국근대화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뉴질랜드는 낙농, 원예, 임업 분야의 생산과 마케팅에 있어서 가장 앞선 국가였다. 1968년에는 한-뉴 양국 정상이 상호 국빈 방문했고 이후 현재까지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문재인 대통령이 뉴질랜드를 국빈 방문했으며 뉴질랜드의 총리, 총독 등이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1971년에는 뉴질랜드 한국대사관, 한국 뉴질랜드 대사관이 개설되어 양국 관계가 원활해지고 1973년도에는 오클랜드 한국무역관이 개설되어 한-뉴 교역 증진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에 힘입어 1974년에는 몇몇 국제결혼 가족, 콜롬보 유학생, 대사관 직원, 원양어선 선원들이 중심이 되어 최초로 ‘뉴질랜드 한인회’를 웰링턴에서 출범하게 되었다. 이후 1991년부터는 지역 한인회들이 출범하여 현재까지 전국에 11개의 한인회가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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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한국인들은 뉴질랜드 녹용 사업을 일으키기 시작했고 200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인들의 주축 비즈니스로 성장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슴뿔은 처리하기 귀찮은 폐기물에 불과했고 사냥꾼 들이 잘라버린 뿔을 한국 기업인들은 마대로 수집하여 녹용을 개발했던 것이다. 또한 한인들은 뉴질랜드에 태권도를 보급하기 시작했고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88년까지의 한인 인구는 체류 중인 자를 포함해도 천명 미만이었으나 뉴질랜드 정부가 유색 인종에 대한 이민 유입을 개방하면서 한인 유입이 성장 물결을 탔다. 특히 1992년부터 발효된 점수제 일반이민 제도 시행으로 한인 사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1990년대는 한인 사회의 고도 성장기로 평가된다. 대한항공의 뉴질랜드 직항 노선이 취항하였고 한 때는 아시아나 항공도 취항할 정도로 한-뉴 이동 인구가 활발하였다. 1990년 대 후반에는 오클랜드에 뉴질랜드 한국대사관 분관과 국민은행 오클랜드 지점도 개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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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뉴질랜드에서 건강식품, 관광/여행, 유학, 무역 등에서 경제 발전에 기여를 하였다. 1997년 말 IMF 사태로 한 때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나 2000년대 들어 장기 사업비자 제도 시행으로 다시 재기를 하였다. 한인 사회인구는 영주권자,/시민권자와 체류 중인 자, 유학생 포함 35,000명 정도를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나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이민제도 시행으로 신규 유입 인구가 줄어들고 있는 실정이다. 이민 연륜이 쌓이면서 2세들의 사회 진출도 활발해지고 주류 사회에 진입하는 한인들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한인들은 학업, 예체능 분야에서 탁월성을 발휘하고 있으며 2008년에는 최초로 멜리사 리 한인 국회의원이 탄생했고 현재까지 4선을 연임하고 있으며 금년 10월 선거에서 5선에 당선될 예정이다. 또한 2008년 재외 동포 한민족체전에서 이민 역사도 깊고 교민 수도 80만 - 300만 규모인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팀들을 제치고 뉴질랜드 팀이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어 2009년에도 우승을 하여 한민족 체전 2연패를 달성하였다.


갈지연 양은 2008년 미국에서 열린 재외 동포 차세대 ‘나의 꿈 말하기’ 대회에서 우승을 하여 뉴질랜드 한인 사회의 잠재력을 한 끗 빛내주었다. 리디아 고 선수는 주니어 때부터 뉴질랜드 골프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으며 아마추어 선수로 캐나다에서 열린 LPGA 오픈 챔피언쉽에서 우승을 차지해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는 역사상 최연소의 쾌거였다. 2013년 프로로 전향한 후에도 뉴질랜드 선수로서 여러 차례의 LPGA 우승을 획득하고 현재도 세계무대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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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사회가 뿌리 내리기 위해서는 한인들의 보금자리인 한인회관이 필요하다. 1999년 11월에는 웰링턴 교민회관이 개설 되었고 2013년 3월에는 오클랜드 한인회관이 문을 열었다. 한인회관은 현재 세대의 공간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만대에 걸쳐 우리 자손들에게 물려줄 자산이기에 알차게 가꾸어 나가야 될 것이다. 이민 역사를 보존하고 음미하며 차세대에 대한 살아 있는 역사 교육 차원에서 ‘이민사 박물관’을 개설해야 된다는 사명감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역사가 없는 민족이나 국가는 정체성을 유지할 수도 없고 다민족  사회에서 정당한 구성원이 될 수도 없다. 마오리 족이 1000년 동안 아오테아로아에 둥지를 틀고 살아 왔지만 그들은 이 땅의 주인 노릇을 못하고 있다. 그들에겐 문자가 없었고 따라서 역사와 문화가 없다. 앞으로의 한인 사회가  뉴질랜드에서 우리 한민족의 꽃을 피우기 위해서 개척의지를 가지고 우리의 창조적인 노력으로 역사를 축적해 나가야 될 것이다.   



 전 뉴질랜드 한인사 편찬위원장  경영학박사  한  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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