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8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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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88)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요한일서 4:7~12>

우리는 항상 어떤 사람을 대할 때나 어떤 상황을 바라볼 때, 내 중심에서 틀에 박힌 대로만 생각하고 받아들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내 기준으로 판단하고, 내 잣대로 재단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여러분! 시계를 한 번 보십시오. 아주 비싼 명품 시계나 값싼 시계나 똑같은 것이 있습니다. 바로 시침 분침 초침이 다 같은 방향으로 간다는 겁니다. 어떤 시계도 시침과 분침과 초침이 따로 놀지 않습니다.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시계를 뒤집어서 뒤를 열어보면 다 다릅니다. 수많은 톱니바퀴 같은 것이 돌아가는데, 어떤 것은 오른쪽으로, 어떤 것은 왼쪽으로 돌아갑니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습니다. 어떤 것은 빠르고, 어떤 것은 느립니다. 그 모든 것이 모아져서 결국에는 한 방향으로 나갑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속한 공동체의 모습도 이와 같습니다.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다른 모습이지만, 그게 모여서 한 방향으로 향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갑니다. 그렇기에 나와 다르다고 이해 못할 것이 없습니다. 나와 다르다고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수용하고, 인정해 주는 것, 그리고 그대로 품어 주는 것, 이게 바로 오늘 주제인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은 12절까지 읽었지만, 담겨진 내용은 4장 전체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서 21절까지의 말씀을 잘 보면 두드러지게 많이 나오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오늘의 주제인 “사랑”인데, 무려 서른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로 스물두번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라는 단어가 스물세 번 나옵니다. 결국 오늘 본문의 중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모습입니다. 더불어 이를 연결해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입니다. 그래서 제목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입니다.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그 사랑이 우리에게 표현되어진 예수 십자가의 희생을 바라보며, 이러한 사랑 받은 자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입니다. 


사랑의 출발은 하나님이십니다. 왜요? 오늘 분명히 선언하죠.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사랑의 종류에 대해서 네 가지로 나눈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에로스(eros)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세상에서의 남녀간의 사랑입니다. 두 번째는 스토르게(storge)입니다. 스토르게는 혈연적인 사랑을 뜻합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피로 얽힌 사랑입니다. 세 번째는 필리아(philia)입니다. 필리아는 친구간의 우정을 뜻하는 사랑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아가페(Agape)입니다. 아가페는 절대적이고 거룩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보내주신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사랑을 아가페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출발된 사랑을 뜻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이미 아가페의 사랑을 받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이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가페의 사랑을 가장 쉽게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님의 자녀를 향한 사랑을 보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이유가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사랑,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사랑이 하나님의 나를 향한 사랑인 것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7절과 8절, 두 절에 걸친 내용의 말씀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반대로 말씀드리면 “하나님을 아는 자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결국 내가 아무리 하나님을 잘 안다고 할지라도 사랑의 실천이 없으면 거짓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안다면,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따르고 있다면,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죠.  

  

세상에서는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해.” 이런 논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는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 좀 나눠주렴.” 이렇게 말씀합니다. 결국 내가 이 땅에서 사랑을 하는 것은 내 것을 사용한다기보다,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대신 생색내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그 사랑의 작은 부분일지라도 기쁘게 나눌 수 있는 우리의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으로 완성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을 보십시오. 그의 사랑은 완전한 자기희생으로 표현되어졌습니다. 오늘 9절에 말씀하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가장 두드러지게 알 수 있는 것,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 가운데 완성되어진 것, 우리 눈에 직접 보여진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그 사랑은 사람들의 영적인 상처를 아물게 합니다. 죄로 오염된 상처를 정결하게 하십니다. 또한 그 십자가의 사랑은 강도를 향해서도, 의인을 향해서도, 살인자를 향해서도, 선을 행하는 자를 향해서도 동일한 효력을 발생합니다.  누구나 주님 앞에서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다 상처 받은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시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의 사랑이 지금도 우리 안에 흐르고 있습니다. “지금 내 안에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다.” 이러한 고백이 믿음 좋은 어떤 특별한 분의 고백만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한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 속에도 동일하게 예수님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피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 받은 자라고 증거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완성된 그 사랑 안에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우리를 통해 증거될 사랑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되어진 사랑, 여기에는 하나님의 몫이 있었고, 예수님의 몫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이제 우리의 몫입니다. 그게 뭘까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으로 완성되어진 사랑을, 나의 삶을 통해 이 땅에 증거 하는 것, 그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몫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증거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사랑하면 항상 실과 바늘처럼 함께 가는 것인데, 바로 희생입니다.

  

유명한 미술가 조르쥬 루오의 작품 중 정작 그림보다 제목으로 더 유명해진 판화작품이 있습니다. 그 작품의 제목은 이렇습니다. ‘의인은 향나무 같아서 그를 찍는 도끼날에도 향을 풍긴다.’ 향나무 입장에서 도끼는 자기를 죽이고, 자기를 괴롭히는 원수와 같은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자기를 찍는 그 도끼날에 오히려 향을 묻혀준다는 것입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입니다. 자기를 찍어 상처를 만드는 도끼날에도 향을 묻히는 향나무처럼,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향해서도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묻힐 수 있는 것. 단순히 용서하는 그 행위를 넘어서서 그 사람 논에 물을 대어주는 것. 온전한 희생을 통해 온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음의 결단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희생이 필요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크게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고, 그 용기와 결단은 희생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내가 손해를 봐야 완성됩니다.  

  

오늘 12절에도 보면 “그의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믿는 자의 삶 속에서 온전함을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이죠. 그럼 어떻게 우리 삶 속에 온전함을 이룰 수 있을까요?  지난 주 설교 제목 기억나시나요? “네 믿음을 보이라.” 우리의 삶 속에서 내가 믿는 자로서의 증거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랑의 온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사랑을 보이라.” 어떻게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를 통해 세상 모든 사람에게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받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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