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44; 거친 들에서... ( 8장 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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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44; 거친 들에서... ( 8장 5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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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삼 년 전 미국의 라스베가스에서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 일반적인 테러와는 너무 달라서 내용을 소개한다. 


범인은 라스베가스의 한 호텔 32층에서 밤에 호텔 앞 컨트리 음악 콘서트 장에 모인 22,000명의 관람객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고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최소 59명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번에도 IS의 테러인가 했는데, 미 수사당국은 증거가 없다면서 이른바 ‘외로운 늑대’의 소행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다. ‘외로운 늑대’란 IS 같은 테러 단체의 일원이 아닌 단독범행을 가리키는 말이다. 테러집단도 아닌 평범한 미국시민이 왜 이런 엄청난 만행을 저질렀는지, 범행동기는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이번 사건의 범인인 패독이라는 사람은 겉으로 봐서는 사회에 잘 적응하고 순탄한 삶을 산 사람처럼 보인다. 64세였던 패독은 수십억 원의 재산을 가진 회계사 출신으로서, 은퇴한 후 라스베가스에서 80마일 가량 떨어진 은퇴자 마을에서 지냈으며, 62세의 아시아계 여성과 동거 중이었다고 한다.

 

패독은 이혼 외에는 일생을 살면서 큰 굴곡을 겪지 않았고, 특별한 범죄경력도 없었다. 그는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주 등에 임대용 부동산을 최소 3곳을 보유하고 있으며, 조종사 면허증과 자가용비행기 2대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패독은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어 있었고, 인생을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모든 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외로움이라는 영혼의 감옥에 갇혀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 외로움은 단순히 홀로 외로워하는 외로움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외로움이었다. 그 결과, 이유도 없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고, 자신도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사건을 접하면서, ‘외로운 늑대’라는 말이 섬찟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고, 사람들은 각자 평범한 일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지만, 이런 평범한 일상의 삶 가운데서 오히려 소외되고, 외로움이라는 덫에 걸려있는 ‘외로운 늑대’와 같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얼마나 무서운 병인지를 알려주는 사건이다. 


우리는 모두 꿈을 안고 남태평양의 아름다운 나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다. 처음 얼마 동안은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서 사는 것이 너무 행복하지만, 삶의 현실에 맞부딪치면서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게 된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좋은 교육제도나 사회환경도 잠시다. 한국에서의 경력과 자격은 아무 쓸모가 없게 되고, 늘지 않는 영어실력에 탄식도 하게 된다. 당연히 한국에서는 해보지도 않던 일에 내몰리게도 된다. 그래도 기쁜 마음으로 희망을 품고 일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희망도 사라지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한숨 지으며 자괴감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교민들이 몸도 힘들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삶이 계속되다 보면, 마음 속에는 외로움이라는 무서운 병이 독버섯처럼 자라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마음 속에 자리하고 있는 외로움이 단순히 외로움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지나친 외로움은 영혼을 병들게 하고, 삶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외롭고 어두운 영혼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하루하루 그저 살고 있을 뿐, 삶의 의미도, 즐거움도, 앞날에 대한 희망도 사라지게 된다. 


그러다 보면, 신자들도 마음 속에는 은근히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불만이 자리하게 된다.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신가,,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그리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데, 내게 해주신 일이 무엇인가,,, 이런 생각들이 들게 된다. 그러면서 믿음도 시들어지고, 영혼도 함께 시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5절은 말한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인생은 거친 들과 같다. 거친 들에서 술람미 여자는 오직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였다. 우리가 이 거친 인생광야를 살아갈 때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이름뿐인 하나님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거친 들과 같은 인생 가운데 살아계셔야 한다.


그러나,, 영혼이 어두운 상자 안에 갇힌 상태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그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자.


시편 13편 1-6절

1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 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4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5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다윗은 너무나 오랫동안 절망적인 상황이 지속되자, 하나님께서는 어느 때까지 저를 피하시렵니까 하는 탄식을 하게 된다. 1, 2절에서만 ‘어느 때까지’라는 표현이 네 번이 나온다. 아무리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고 외쳐도, 하나님은 침묵하시고,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았다. 다윗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조차 보이지 않는 깊은 어둠의 절망 속에서도 한 가지 붙잡고 놓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주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주의 사랑을 알기에, 그리고 그 사랑을 의지하기에, 다윗은 주께서 자신을 죽음의 어둠 속에서 건져주실 것을 굳게 믿을 수 있었다. 


결국 다윗은 주의 사랑을 의지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은덕을 감사해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의 찬송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은혜라는 뜻으로 쓰인 ‘은덕’이라는 단어는 열매가 크게 잘 열리도록 가지에 상처를 낸다는 뜻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도 이와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윗이 겪었던 죽을 것만 같았던 그 기나긴 어둠의 시간도, 아무리 부르고 찾아도 보이지 않고 얼굴을 숨기시던 하나님도, 하나님의 은덕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은혜의 또 다른 측면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때로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때로는 극심한 절망과 고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의 과정은 더 큰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상처 내심’이다. ‘거친 들’은 힘들지만,,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장소인 것이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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