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45;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8장 5-7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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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원병의 아가서 묵상 45;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 8장 5-7절 )

일요시사 0 1045 0 0

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6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7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거친 들에서 피곤하고 지친 술람미 여자를 깨운 자리는 바로 사과나무 아래였다. 그런데 그냥 사과나무가 아니다.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곳, 사과나무 아래다.


왕이 술람미 여자를 깨운 곳은 바로 술람미 여자가 태어난 자리다. 주님께서 성도를 깨우시는 자리는 그들이 태어난 자리다.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다. 거친 들과 같은 삶에 지친 영혼들을 깨우고 힘을 주는 것은 주님의 십자가다. 성도들은 주의 십자가에서 깨어날 때, 그분의 사랑을 의지하고 인생의 거친 들을 올라갈 수 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죽음보다 강한 주의 사랑을 만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자녀로 낳으시기 위해서 가장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에 내주셨다. 이것이 우리를 낳으시기 위해 겪으신 하나님의 산고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고통은 또 어떤가? 


마태복음 27장 45-46절

45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 구 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유대시간으로 육 시는 로마 시로는 낮 열두 시, 구 시는 오후 세 시다. 정오부터 오후 세 시까지,, 하루 중에 가장 밝은 시간이다. 해가 가장 빛나는 그 시간에, 온 땅에 어둠이 깔렸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겪으신 마지막 죽음의 고통이 세상의 모든 것을 삼켜버린 것이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늘 아버지로부터 버림 당하는 아들의 부르짖음,, 이는 육신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육신의 고통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겠지만, 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 있었다. 주님께서는 해도 삼키는 영혼의 깊은 어둠 속에 갇혀 부르짖으셨던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시면서,,,


십자가의 죽으심은 단지 죄 씻김의 상징적인 사건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모든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집행된 자리다. 주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죄를 모두 떠 안으신 죄인으로서 아버지로부터 버림 당하시며, 아버지의 진노의 심판을 받으셨다. 그러나,, 끝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의 손은 놓지 않으셨다.


이것이 죽음같이 강한, 아니,, 죽음보다 강한 주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자리는 어떤 고난이나 역경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극복되는 자리다. 그곳에는 죽음보다 강한 주의 사랑이 영원한 생명의 능력으로 역사하기 때문이다.


그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십자가 나무 아래에서 우리는 깨어나야 한다. 어렵고 힘들수록,, 삶이 무력해지고, 마음이 약해지고, 영적으로 침체될수록,, 십자가 아래에서 죽음보다 강한 주의 사랑을 만나야 한다. 


6절에서 왕은 술람미 여자에게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십자가 사랑을 도장 같이 마음에 새겨야 한다. 


주께서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포도나무와 가지로 비유하면서, 요한복음 15장 9절에서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셨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메말라 버리듯이, 성도들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멀어지면 영혼이 메마르게 된다. 


그런데 포도나무 비유에는 중요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에스겔 15장 1-3절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숲 속의 여러 나무 가운데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3 그 나무를 가지고 무엇을 제조할 수 있겠느냐? 그것으로 무슨 그릇을 걸 못을 만들 수 있겠느냐?


포도나무는 나무라고 하기에는 부끄러울 정도로 아주 볼 품 없는 나무다. 백향목처럼 고급건축자재로 쓸 수 있는 나무도 아니고, 리무처럼 아름다운 가구를 만들 수 있는 나무도 아니다. 


모든 나무들 가운데서 포도나무가 나은 것은 하나도 없다.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도 쓸모 없기는 마찬가지다. 포도나무나 그 가지는 가늘고 꼬불꼬불해서 전혀 쓸 모가 없다. 아무 것도 제조할 수 없고, 심지어 못도 만들지 못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자신을 포도나무에, 우리를 포도나무 가지에 비유하셨다. 세상에서는 주님도, 우리도 그런 존재들이다. 세상적으로는 아무 자랑할 것이 없는 존재들이다.


세상에서 레버논의 백향목 같이 아무리 크게 성공하더라도, 주님을 떠나서는 메마른 가지에 불과하다. 마지막 날, 불에 던져질 뿐이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만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는 주님 안에서만 의미 있고, 귀한 존재인 것이다.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고, 오직 주님 안에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는 자다. 


그들은 오늘도 거친 들에서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여 올라간다. 인생이라는 거친 광야에서 오직 죽음보다 강한 주의 사랑만을 의지하며 힘차게 올라간다.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고, 홍수라도 이 사랑을 삼키지 못한다(7절). 아무리 큰 고난과 역경도 우리를 향하신 주의 사랑을 끌 수 없고, 죽음의 세력이 홍수처럼 삼키려 해도, 주님의 사랑은 삼킬 수가 없다. 주님의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한 사랑,, 아니 죽음조차도 삼키는 부활의 생명력으로 역사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성도는 주님이라는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그분의 가지가 되는 것이다. 죽음보다 강한 주님의 사랑에 붙들린 자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직 주님 달리신 십자가만을 자랑한다. 



채원병 목사<오클랜드정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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