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91) 예수님처럼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91) 예수님처럼 <히브리서 12:1~3>

우리가 신앙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듣는 말이 이겁니다. “믿는 자는 예수님 닮아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님이 쓰신 성경 공부 교재 중에 “예수님짜리”라는 책이 있습니다. 100원 주고 사면? 100원짜리입니다. 만원 주고 사면? 만원짜리입니다. 예수님 주고 사면? 예수님짜리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님을 주고, 그의 피값으로 사셨기에, 당신은 얼마짜리입니까? 예수님짜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짜리의 값어치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예수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말은 쉽죠. 누구나 다 “그래요. 예수님처럼 살아야지요.” 말 하기는 쉽지만, 정말 깊이 생각해보면, 너무 부담되는 말입니다. 정말 내가 예수님짜리로, 정말 내가 예수님처럼 살 수 있을까?

 

 “예수님처럼”이라는 한 커다란 목표를 향해서 우리가 오늘도 믿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걸 바로 성화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이 말씀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너무 멀리 있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길에 서 있습니다. 함께 말씀을 통해 오늘도 한 걸음 더 예수님 닮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내 길을 먼저 잘 걸어야 합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가면 지하에 묘지가 있습니다. 영국의 수많은 왕족과 유명인사들이 그 곳에 묻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뉴턴이라던가, 영국의 노예해방을 이룬 윌리엄 윌버포스, 유명한 작곡가 헨델, 소설가 찰스 디킨스도 있습니다.  

  

그 중에 한 영국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가졌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좀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었을 때, 나는 내 시야를 약간 좁혀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겠다고 결심했다. 이 역시 되지 않았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내 가족을 변화시키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누운 자리에서 나는 문득 깨닫는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을. 또한 그것에 용기를 얻어 내 나라를 더 좋은 모습으로 바꿀 수 있었을 것을. 그리고 누가 아는가 세상도 변화되었을지를!” 무엇을 하든지, 항상 출발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크게 시작합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누군가요? 바로 앞장인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된 믿음의 인물들을 뜻합니다. 한결같이 믿음으로 승리한 믿음의 선진들입니다. 오늘 제목에 비추어보면, “예수님처럼” 이 말에 가깝게 살아간 믿음의 증인들입니다. 그리고 숨도 쉬지 않고, 이어서 말씀합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저 수많은 믿음의 인물들이 있지만, 그에 앞서 먼저는 내 앞에 한 걸음부터 바로 걷는 것을 권고합니다. “예수님처럼” 어느 날 한번에 “짜잔”하면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오늘도 예배하는 이 시간,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기 위해, 내 길을 먼저 한 걸음 잘 내딛기 위해, 버려야 할 모든 무거운 것,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자 우리는 기도합니다. 이게 뭐 엄청난 사탄의 계략이나 커다란 중범죄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무심코 내뱉는 내 가족을 향한 짜증스러운 말 한 마디, 나도 모르게 익숙해져있는 험담의 말이나 부정적인 말들, 잘못된 습관을 먼저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 앞에 당한 믿음의 경주를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나 자신의 마음, 말 한마디, 눈빛 하나 변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서 나의 일생이 달라집니다. 이를 통해 나와 내 주변이 함께 “예수님처럼”으로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내게 주어진 길, 그 길을 먼저 하나님 기뻐하실만한 길로 만들어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멀리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멀리 바라보는 것”은 당장의 일로 일희일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2절에 말씀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럼 우리가 바라볼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예수님은 저 앞에 예비된 부활의 때를 바라보셨습니다. 그렇기에 지금 내 앞에 있는 십자가를 참으시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저 멀리에 예비된 하나님 보좌 우편의 영광을 바라볼 때에, 지금 당장의 고난과 수치의 문제를 이겨내신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보통 마라톤에 비유하곤 합니다. 단거리에 승부가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장거리 경주입니다. 따라서 멀리 바라봐야 합니다. 마라톤 선수가 지금 당장 출발하자마자 일등으로 달려나가는 것에만 목표를 세우고 힘을 다 쏟아 부으면 아예 완주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앞선 11장 후반부에 보면, 수많은 고난과 박해와 핍박을 이겨낸 믿음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저들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억지로, 겨우 당한 것이 아니라, 담대하게 고난에 맞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고난에 맞선 믿음의 인물들을 나열하면서 마지막에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 어떤 세상의 위협과 겁박에도 절대로 굴하지 않는 믿음의 담대함을 보여줍니다. 어떻게 저들이 이런 담대함을 가질 수 있었는가? 지금 당장의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서 눈을 돌려 멀리 바라볼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소망, 완전한 확신이었습니다.

  

지금 당장만 너무 기대하지 마십시오. 예수님도 죽으시고, 사흘이라는 어둠의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그 이후에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게 됩니다. 지금 내 사업장이, 직장이, 영주권 문제가, 자녀들의 신앙의 모습이나 앞길이, 내 남편, 내 아내의 모습이 어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보일지라도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면, 반드시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게 될 줄 믿습니다. 믿음 가지고, 저 멀리를 바라보고,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게 무엇일까요? 내 마음입니다. 스티브 멕베이는 [은혜가 다스리는 삶]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싶으나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마음에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가 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물려줄 유산 중에 자신의 몫을 미리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유산을 미리 물려주고, 아들은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모든 것을 잃고 집으로 돌아오게 되죠. 이 이야기는 결국 해피엔딩입니다. 세상 말로 불효막심한 자식이었지만, 아버지는 돌아온 탕자를 아들로 받아들여줍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요?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탕자가 돌아올 수 있었을까요? 누가복음 15장 17절입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탕자의 마음에 아버지가 계셨다는 겁니다. 멀리 떨어졌지만, 허랑방탕한 삶을 살았지만, 그래도 탕자는 아버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 마음에 여전히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아버지께로 돌아올 마음을 가질 수 있었고, 아버지 앞에 와서 회개할 때에, 아들의 지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선한 자아로 되는 게 아닙니다. 착한 마음 가지고 예수님처럼 되는 게 아닙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이 계셔야 예수님처럼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말씀합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언제나 예수님을 생각하고 살아야 낙심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습니다. 내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면 혹 방황하는 중에도 다시금 돌아올 수 있습니다. 또한 내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면, 혹 힘겨운 문제가 닥쳐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지금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낙심되는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면, 혹 방황하고 혹 흔들릴지라도 다시 주님 앞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고, 언제나 예수님을 깊이 생각함으로, 주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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