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한인 발자취' 유튜브 영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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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한인 발자취' 유튜브 영상으로...

일요시사 0 1283 0 0

<역사란 무엇인가> 책에서 ‘역사란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해석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다’라고 표현했다. 이는 과거와 현재가 서로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역사는 기록의 산물이다. 뉴질랜드의 현지 주민인 마오리들은 그들의 언어는 있었지만 문자는 없었다. 만약 그들의 역사가 기록되어져 있었다면 아마도 뉴질랜드의 역사는 현재의 New Zealand가 아닌 몇 천년의 역사가 이어진 180도로 바뀌어진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와같이 역사는 참으로 소중하고, 그 역사를 기록한다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고 소중한 가치를 갖는다. 



<뉴질랜드 한인사> 편집장 한일수 박사와의 대담



<뉴질랜드 한인사> 는 4년동안 여러 사람들의 발로 뛰는 수고와 노력끝에, 자료 수집과 편집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수많은 한인 1세대들이 문호를 자유롭게 개방하지 않은 이 나라, 뉴질랜드에서 정착하기란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한인 발자취” 유튜브 영상의 첫 준비 모임은  <뉴질랜드 한인사> 편찬위원장 한일수 박사와의 대담으로 이루어졌다.




<뉴질랜드 한인사> 출판 계기와 최초의 뉴질랜드 

거주 한국인들


2003년 어느날 한인회 고문 자문위원 모임이 있었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고문이 되어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했는데, 이민 1세대 분들이 아직 살아계실때 한인사를 만들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가 제가 편찬위원장이 되었습니다.


이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1971년 7월 1일을 한인사 원년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때 재뉴 한국 대사관 개설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1953년 한상원씨가 한국 은행 국고 부장으로 재직중 뉴질랜드의 중앙은행 제도를 연구하고 한국으로 돌아갔습니다. 제가 그를  한국에서 직접 만났고, 그가 쓴 기록물도 가져와서 많은 참고를 했습니다, 또한 김영성 교수가 교환 교수(1993년)로 다녀간 후, 그의 논문에 의하면 1945년 3월 통계에 4명의 한국인이 거주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간호사들, 원양 선원들의 단기 거주와 콜롬보 플랜


1954년부터 한국 간호사들이 뉴질랜드의 국책사업(Council of Relief Service Overseas)으로 이곳에 체류하며 1년간 연수를 했습니다. 이는 당시 가난했던 대한민국이 간호학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원양 어선이 뉴질랜드에 입항하면서 선원들은 배가 항구에 정박해 있는동안 체류했습니다. 국제 단체인 Seaman’s Club과 국제 선원 선교(Ocean Mission) 그리고 CCC (Commonwealth Covenant Church) 를 통해서 한국 선원들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CCC 의 Watkins 목사님은 선원들 뿐만 아니라 많은 한인들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현지 정착에 필요한 도움을 주셨고, 매주 예배를 드렸습니다. 또한 1984년에 정식 등록한 웰링턴 한인 연합 교회는 사실상 1978년부터 김경룡 수산관 부부에 의해서 매주 Smith 목사님의 설교를 통역하며 예배를 드렸고, 한인들은 선원들과 함께 자주 모여서 식사를 하며 고국의 정과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또한 콜롬보 플랜(Colombo Plan) 은 영연방 국가들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경제 개발을 위한 국제 협약으로, 뉴질랜드에서는  6개월에서 3년까지 목축, 낙농, 원예, 임업 분야의 인재들을 가르치며 항공료, 학비, 생활비, 책값, 심지어 용돈까지 뉴질랜드에서 국비로 지원하였고, 당시 총 263명의 한국인들이 들어와서 혜택을 받았습니다. 그 중에 한명이 우준기 박사입니다.

1962년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 그러나 

극소수에게만 열린 이민


1962년 공식적인 외교 관계 수립이 있었고,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문, 뉴질랜드 총리의 방한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1971년 7월에 한국 대사관이 처음 개설 되었습니다. 하지만 뉴질랜드에 정착한 사람은 극소수였습니다. 1962년에 한국인 고아 김성미씨는 Smyth 부부에 의해 양녀로 입양되었고, 뉴질랜드 사람들과 국제 결혼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전 참전용사 Mr. Morton 과 결혼한 Mrs. Morton, 김영이씨 모친, 한현순씨, 김수자씨 등과 홍성묵 교수(캔터베리 대학 심리학 교수), 박영 대리대사 가족, 대사관 및 무역관 직원들, 1등 항해사 출신 김진영씨 등이 한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재뉴 한인회 창립과 초기 한인들의 모임


1974년 통계 자료에 의하면 103명의 선원들과 10명의 콜롬보 유학생, 16명이 상주했다고 합니다. 그 해, 한인회 창립 모임이 있었는데 강춘희 대사, 박흥섭 회장, 박태양 총무, 우준기 박사, 우향순씨, 김영이씨, 대사관 직원인 장경득씨 등이 모였습니다. 그 뒤, 베트남 패망 후 현지에 있던 한국인들이 뉴질랜드에 입국했습니다. 또한  천적이 없어서 골칫거리였던 사슴은 한국 사람들로 인해서 녹용 사업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김경준씨, 이성방씨 등이 우수한 녹용을 한국에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홍성옥 박사는 3년간 뉴질랜드 임업 연구소에서 연구하였고, 1975년에는 태권도를 보급한 이정남씨와 윤홍기 박사가 오클랜드 대학 교수로 들어왔습니다, 1977년에는 콜롬보 플랜 유학생으로 왔던 고금숙씨가 John Classen과 결혼하여 이주하였고, 1980년에 변경숙씨가 Roy Wilson과 결혼하여 웰링턴에서 정착했습니다 




1987년 투자 이민제도 시행으로 인종 구분없이 

이민 허용


뉴질랜드는 호주와 마찬가지로 유색 인종에 대한 이민 문호가 개방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이나 캐나다 보다 약 30년 정도 늦어진 것입니다. 유럽이 더이상 의지할만한 국제 시장이 아니므로, 뉴질랜드는 전 세계 오일쇼크의 영향과 1987년 미국 뉴욕의 주가 대폭락의 블랙먼데이( Black Monday)로 기인한 세계적인 경제 침체 위기로 인해서 유색 인종에 대한 이민의 문을 열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준비 기간을 거쳐 1989년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인 이주자들이 들어왔고, 1991년부터 점수제 일반 이민 제도가 생겨서 기하 급수적으로 교민 사회가 팽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초기 이민자들의 국제 결혼, 까다롭게 허가받은 취업 등과 같은 특수한 이민과는 달리 많은 한국인들이 일반 이민으로 뉴질랜드에 들어올 수는 있었지만 적응이 쉽지 않았습니다. 


1982년 웰링턴에 한국식당이 처음 생겼지만 당시 한인들은 전국에 100여명 정도 있었고, 한국 음식을 전파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곧 폐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이민 알선기관, 이주 화물업체, 모텔, 식당, 한국 식품점, 여행사, 부동산, 자동차 판매/정비수리, 생활 용품/가구점 등이 창업되었습니다. 1988년 신 이민법 (투자 이민제도) 발효의 첫 이주한 한국 교민은 현재, 국민당(National Party) 의 국회의원인 멜리사 리의 아버지 이팔용씨 가족입니다. 그 뒤, 1991년에는 교민 체류자, 원양어선 선원 등 약 1200여 명의 교민이 살게 되었습니다.




뉴질랜드 한인들의 양적 활성화


수많은 한인들이 유입되면서 비지니스가 활성화되어 한인 업소들이 오클랜드와 웰링턴, 크라이스트처치 등의 지역에 생겨나면서 1992년에 최초로  뉴질랜드 한인 주소록도 발간되었습니다. 오클랜드 지역 257가정, 웰링턴 지역 35가정, 크라이스트처치 지역 26가정, 기타 지역 18가정 등 총 336가정의 개인 신상들이 개재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각종 언론물도 창간되었습니다. 1991년 월간 “소망 순복음”으로 시작해서 주간 “크리스천 뉴스”가 창간되었고, 생활 정보지로 처음 등장한 것은 1992년 격주로 “생활정보” 지 (현재, 코리아포스트로 개칭)가 나오면서 교민들의 정보와 한인 업소들의 필요 충분 조건에 맞추어서 각종 광고들이 실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각종 종교 단체들과 한국 학교도 생겼습니다. 1993년 항공 협정이 이루어지면서 대한항공이 서울- 오클랜드 직항로를 개설, 운송 규모에 따라 크라이스트처치까지 운항할 때도 있었고, 1996년에는 주뉴 한국 대사관 오클랜드 분관도 개관되었습니다. 그러나 1997년 한국의 금융위기 IMF의 영향은 이곳에도 있어서 한국 관광객들과 유학생들이 더이상 들어오지 않게 되었고, 많은 관광, 유학 업소들이 폐업을 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역 이민의 경우도 생겨났습니다. 당시 뉴질랜드의 한인 사회는 고국 의존도가 높았기때문에 타격이 많았고, 제 3국 (호주, 미국, 캐나다 등)으로의 재 이민의 경우도 생겨 났습니다. 또한 1999년에는 웰링턴에 뉴질랜드 한국 교민 회관이 개관되었고, 김대중 대통령의 방문도 있었습니다. 그날 참석한 200여명의 교민들은 감격스러운 대통령의 방뉴를 환영했고, 김덕수 사물 놀이패의 공연과 초청가수 코리아나와 함께 ‘손에 손 잡고”를 합창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글은 한일수 박사와의 대담과 책 <뉴질랜드 한인사> 를 유튜브로 만들때 쓰여질 1부,2부 내용을 뉴질랜드 한인사 중심으로 간략히 정리, 요약한 것이다.



“뉴질랜드 한인 발자취” 유튜브 영상은 총 3부로 구성된다.


1부: NZ 개요, 한국전쟁, 초기한인들의 발자취


2부: 1970년-1999년 중기 한인들의 발자취


3부: 2000년-2020년 현재 한인들의 발자취


그리고 4부는 뉴질랜드를 빛낸 인물들의 인터뷰와 편집 후기 모음이 진행될 것이다. 



책으로 쓰여진 것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었지만, 유튜브 영상은 좀 더 간결한 내용을 스토리 위주로 간담회 혹은 인터뷰 형식으로 담겨질 예정이다.


“뉴질랜드 한인 발자취”의 유튜브 영상이 만들어진다는 기사가 게재된 이후, 몇몇 사람들의 관심과 호응이 있었다. 희귀 자료들이 있어서 보내주겠다는 크라이스트처치에 사는 분도 있었고, 사진과 관련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분들도 있었다. 또한 한 지인의 우연한 대화가 실감있게 전달되었다. 


“ 저의 부모님과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한국에서 호주까지 비행기를 타고 오셨고, 호주에서 웰링턴까지 배를 타고 뉴질랜드에 오셨대요. 머나먼 이국땅에서 낯설고 물설고 언어도 안통하는 이곳에서, 변경숙님과 그의 남편 Roy께서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다고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아직도 말씀하세요.  저는 한국 부부들 중에서, 이곳 웰링턴에서 처음 태어났다고 다들 기뻐해주시고 사랑을 나누어 주셨다고 했습니다. 제가 지금 30대 후반 이니까 벌써 세월이 많이 지나갔네요.”




글 “뉴질랜드 한인 발자취” 의 작가 윤세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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