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3) 베데스다 연못에 임한 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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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103) 베데스다 연못에 임한 치유 <요한복음 5:2~9>

일요시사 0 902 0 0

   오늘 말씀의 배경은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 혹은 긍휼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가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서 물을 움직일 때에, 누구든지 먼저 물에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게 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천사가 치유라는 자비를 베푸는 곳이라고 해서 자비의 집 베데스다가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천사가 물을 움직이기를 바라며, 연못에 먼저 들어가 병을 고침받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곳에 모여 있던 그 상황입니다. 이게 오늘의 배경입니다. 아마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을 겁니다. 또는 이미 치료를 받을 대로 다 받아 봤지만, 소용이 없었던 사람들도 있었겠죠. 경제적인 문제건, 의학적인 문제건 간에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심정으로 모여 있었던 곳이 바로 이 곳 베데스다였습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우리의 삶이 다 이 베데스다 연못과 같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기에 오늘 베데스다 연못에 모인 사람들이나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들이나, 세상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 똑같습니다. 모두 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다 자비를 원하고 있는 사람들, 치유를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제목 “치유”는 원래 신앙적인 용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더 많이 씁니다. 영어로 하면 “힐링” 제가 인터넷에 “힐링” 쳐봤더니, 심리상담, 단식원, 맛집, 과학, 여행, 쇼핑, 모든 분야가 다 나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힐링 힐링해도 세상에 정말 완전한 치유가 있던가요? 

  

오늘 이 자리가 세상 어디에서도 줄 수 없는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는 자비의 집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완전한 치유를 경험하기 위해, 오늘 베데스다 연못가에 임한 치유의 역사가 우리 삶 가운데 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치유를 위해 예수님이 찾아오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먼저 우리에게 은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베데스다 연못가에 찾아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치유를 바라보며 베데스다 연못가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치유의 역사를 이루시기 위해 병든 자를 찾아 오십니다. 여기에, 여기에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도움을 받으려고 찾아가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도움을 주시려고 우리를 찾아오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곳을 그렇게도 찾아갑니다. 하다못해 맛있는 한 끼 식사를 위해서도 어디든 찾아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찾아 오셨습니다. 먼저 찾아 오셨습니다. 이게 바로 엄청난 은혜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나를 찾아 오셨다는 것. 우리는 다만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문을 열기만 하면 됩니다. 그 순간 주님이 내 안에 들어오시고, 치유의 역사가 시작되는 줄 믿습니다. 

  오늘 베데스다 연못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 안에서 그들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죠. 이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뭘까요? 일등만 낫는다는 것입니다.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서 긍휼을 바라는 눈빛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모두 결국에는 경쟁자입니다. 천사가 긍휼을 베풀지만, 긍휼과 자비보다는 오히려 일등이 되지 못한 사람의 더 많은 탄식과 아픔만이 가득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병이 오래된 환자를 주목하셨습니다. 여기에 엄청난 은혜가 있습니다. 모두가 연못을 바라보는데, 연못에서 치유가 일어날 것이라 소망하며 그 연못을 바라보고 있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연못에 가까이 가려고 하는데, 정말 치유의 권세를 가지신 분은 저 언저리에 앉은, 경쟁에서 밀려난 38년이나 된 소망이 없는 한 환자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내가 헛된 것을 향해 찾아 나서는 순간, 어떻게 해서라도 그 부질없는 것에 가까이 가려고 그렇게 발버둥치고 있는 그 순간, 이미 어느새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마음의 상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마음의 치유가 먼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다 내 안에 무거운 짐을 지고 있어요. 그 짐을 지고 지금까지 일평생을 살아왔습니다. 계속해서 사람들의 말로 인해, 관계성에서 오는 상처들로 인해 계속 그 짐이 쌓여갑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오늘 베데스다 연못을 다시 보십시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찾아가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참으로 어이없는 질문입니다. 병자에게 낫기를 바라느냐고 묻는 것은 하나마나한 질문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병자가 무조건 낫고 싶어 할 것이라는 것도 어쩌면 우리의 편견입니다. 이 병자는 38년을 병을 가지고 살았기에 오히려 이 병에 너무 익숙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어보신 것입니다. 어느 하나에 길들여지면, 익숙해지면 그 틀을 벗어나는 것도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오늘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정말 너의 가장 큰 소원이, 네 마음속에 가장 크게 자리 잡고 있는 생각이 병 낫는 것에 대한 소망이냐는 말씀입니다. 뭐 그런 어리석은 질문이 있냐고 생각 할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이 물음은 환자의 정곡을 찌르셨습니다. 보십시오. 38년 된 병자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던져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이 병자는 병 낫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대신 남을 향한 원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오히려 병으로 인한 육체는 이제 그냥 살만한데, 돌이킬 수 없는 마음의 병이 점점 깊어지고만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에 죄가 계속 쌓여갑니다. 따라서 이 병자에게 가장 큰 병은 38년 된 자신의 몸에 있는 병이 아니라, 남을 향한 원망으로 가득 찬 마음의 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육신의 병을 보았지만, 예수님은 그 병자의 마음의 병을 보신 것입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내가 불행한 것 역시 다른 사람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펜을 바꾼다고 좋은 글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오늘 38년 된 병자를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 말씀에 의지했더니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더 심각한 마음의 질병까지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만 의지하심으로 먼저는 내 마음에 자리 잡은 원망과 불평을 비롯한 모든 마음의 질병이 고침 받고, 세상의 삶 가운데도 모든 것들이 해결되어지는, 고쳐지는, 열려지는 하나님의 치유의 은혜를 경험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영적 치유를 통한 완전한 치유입니다. 


자, 이제 38년 된 병자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치유를 경험했습니다. 육신의 질병도 마음의 상처도 다 해결 받았습니다. 그러면 해피엔딩이죠.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병자가 고침을 받은 건 좋았는데, 그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다는 것입니다. 38년 된 병자는 고침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이제껏 자기가 깔고 앉았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제재를 가합니다.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이 옳지 않다.” 그러면서 그런 일을 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추궁을 합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병자를 고쳐주고 그에게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한 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후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쫓아다니며 사사건건 시비를 겁니다. 뭔가 더 큰 꼬투리를 잡을까하면서 뒤를 계속 쫓아다닙니다. 38년 동안이나 거동도 못하던 병자가 일어난 기적을 보고서도 그 기적을 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니라, 안식일인데 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안식일을 범하는 모습만 보았고, 그것을 정죄하기에만 급급합니다. 이 병자는 병이 나은 것에 대한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영락없는 죄인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을 정죄하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본문 뒤에 나오는 17절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도, 어느 순간에라도 항상 일하고 계십니다. 여기가 끝이 아닙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고침 받은 병자를 향해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영적인 치유까지도 선포하십니다. 완전한 치유입니다. 그 예수님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치유, 이를 통한 완전한 치유의 역사가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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