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2 ; 시인 - 제임스 백스터 (James K. Baxter)

교민뉴스


 

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2 ; 시인 - 제임스 백스터 (James K. Baxter)

일요시사 0 453 0 0

<1926년 6월 29일~1972년 10월 22일>


너무 일찍 태어나 빛을 보지 못한 문학 천재 


그는 수염을 기르고, 초라하게 옷을 입었고, 

거의 맨발로 다니다시피 했다. 

이름도 제임스 대신 마오리 이름인 헤미(Hemi)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이런 이미지는 지금도 제임스 백스터 하면 떠오르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시인이 되고 싶다면 사랑에 빠져본 경험이 있어야 하고, 사람들과 어울려 술을 즐겨 마셔야 한다”고, 안도현은 말했다. 달콤한 사랑의 맛과 쓰라린 이별의 고통 그리고 잠시 나를 잊게 해주는 알코올을 통해 또 다른 세상을 봐야 한다는 뜻이다.

 

정치가나 사상가가 아닌 시골 마을에 사는 한 시인이 뉴질랜드 역사의 한 물줄기를 만들었다. 그가 쓴 시는 키위들 가슴속에 절절히 박혀 ‘정신’이 됐다. “시는 무기”라고 외친 박노해 말처럼, 무기가 된 시가 뉴질랜드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아들, 훌륭한 시인이 될 것" 예언


 제임스 케이 백스터. 그는 뉴질랜드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으로 알려져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1천 편이 넘는 시를 썼다. 대학 시절 사랑에 실패해 알코올 중독자가 됐고, 반전주의자로 이름을 날렸고, 뉴질랜드 히피 문화를 상징하는 공동생활체를 만들어 사회의 귀와 눈을 끌었다. 

 이 시인을 소개하면서 중간이름(Middle Name)의 첫 알파벳(K)을 거론하는 이유가 있다. K는 스코틀랜드 사회주의자 키어 하디(Keir Hardie, 1856~1915)의 이름 약자이다. 아버지 아치볼드 백스터(Archibald Baxter)가 붙여줬는데 이것만 봐도 아버지 사상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제임스 백스터는 1926년 6월 29일 더니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제임스를 낳기 전 신에게 기도했다. 신은 그에게 “아들은 훌륭한 시인이 될 것”이라고 계시했다고 한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첫날, 제임스 백스터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했다. 교실에서 화상을 입었다. 말이 화상이었지 사실은 제임스 백스터가 저지른 자작극이었다. 제도 교육을 받기 싫었던 꼬마 제임스가 세상에 대항해 벌인 첫 번째 싸움이었다.

 제임스 백스터는 일곱 살에 첫 시를 썼다. 조그마한 농장을 갖고 있던 아버지 밑에서 시심(詩心)을 키웠다. 열 살이 조금 지났을 무렵에는 영국 런던에서 생활했다. 몇 해를 그곳에서 지내다가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와 킹스 하이 스쿨(King’s High School)을 다녔다. 그는 1944년 친구들보다 한 해 앞서 오타고대학에 들어갔다. 

 학창 시절은 불행한 추억으로 이어졌다. 아버지는 반전주의자로 낙인찍혔으며, 형은 병역기피 혐의로 유치장에 갇혔다. 그때 시대 상황에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는 ‘이단자들’이었다. 자연스럽게 제임스 백스터는 친구한테 왕따를 당했다.



짝사랑 실패로 알코올 중독자 돼

 

젊은 날에 실패한 짝사랑도 그를 힘들게 했다. 상류층이라고 할 수 있는 의사 딸을 사랑했지만 결론은 대답 없는 메아리뿐. 대신 제임스 백스터가 고른 것은 알코올이었다.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심리치료사에게 도움을 받는 단계까지 이르렀지만 시인으로서는 한층 세계를 넓게 볼 수 있는 황금 같은 시절이었다. 

『비욘드 더 팰리세이드』(Beyond the Palisade, 울타리를 넘어서)라는 제목으로 첫 번째 시집을 펴낸 것도 이 시기였다. 짝사랑한 여자를 위해 삼부작 연시를 썼다. <콘보이스>(Convoys, 호위자들)라는 시로 맥밀런 브라운 상(Macmillan Brown Prize)을 받으면서 시단에 정식으로 명함을 내놓았다. 정신적으로 깊은 나락에 빠져 있었던 1942년부터 1946년까지 백스터는 훗날 그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 600여 편에 가까운 시를 쏟아놓는다.

 이별의 쓴잔을 마신 제임스 백스터는 학교를 등지고 농장과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사랑의 슬픈 추억을 걷어냈다. 그때 뜻하지 않은 사랑이 찾아왔다. 마오리 여학생 재키 스텀(Jacquie Sturm, 1927~2009, 시인이자 단편소설 작가)을 만나면서 그 여자와 그 여자의 뿌리인 마오리문화와 사랑에 빠졌다. 1948년 그들은 마오리와 파케하 두 문화를 공유하며 살겠다는 마음을 품고 화촉을 밝혔다. 

 제임스 백스터는 크라이스트처치 프레스(Christchurch Press)에서 편집자로 잠시 일했다. 같은 해 앵글리칸 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웰링턴으로 집을 옮겼다. 웰링턴교육대학에 들어가 교사자격증을 딴 백스터는 1954년 이푸니 초등학교(Epuni Primary School)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곧 그만뒀다. 가르치는 일이 기쁘지 않았다.

 그는 교육 관련 출판물을 다루는 회사에 들어가 자료를 만들어 내면서 많은 시를 생산해 냈다. 풍부한 자료가 시심을 자극해 창작열을 불태우던 시간이었다. 라디오 대본과 연극 대본도 써서 무대에 올렸다. 



인도 여행 뒤 히피 공동체 관심 가져


 1958년은 그의 삶에서 어느 해보다 중요한 때였다. 유네스코 장학금을 받아 일본과 인도를 여행했다. 인도 빈민의 처절한 삶을 눈으로 본 그는 뉴질랜드로 돌아온 뒤 공동생활에 관심을 두었다. 히피 공동체였다.

 그때부터 제임스 백스터는 철저히 사회에 등을 돌렸다. 반전주의자가 돼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글을 쓰고 연설을 했다. 그는 1960년대 뉴질랜드를 휩쓸고 간 저항운동의 핵심인물이었다.

 백스터는 1966년 오타고로 돌아갔다. 2년짜리 로비 번스 장학금(Robbie Burns Fellowship)을 받았다. 그즈음 결혼생활은 파경으로 끝났다. 1969년 서른세 살에 왕가누이(Whanganui, 북섬 남서쪽에 있는 도시) 예루살렘(Jerusalem)에 생활공동체를 차렸다.

 돈도, 책도, 하나님 경배도 필요 없는 곳. 파케하 호칭도, 마오리 호칭도 중요하지 않은 곳. 그들만 누리고자 했던 유토피아를 만들었다. 지금이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1960년대만 해도 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다.

 그는 수염을 기르고, 초라하게 옷을 입었고, 거의 맨발로 다니다시피 했다. 이름도 제임스 대신 마오리 이름인 헤미(Hemi)라고 불러주기를 바랐다. 이런 이미지는 지금도 제임스 백스터 하면 떠오르는 상징으로 남아 있다.

 


‘제임스 키어 백스터-내 친구’로 기억돼


 예루살렘 공동체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마약을 하며 자유분방하게 사는 그들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마을 사람들이 관계 당국에 수 차례 고발해 공동체 사람들은 둥지를 떠나야만 했다. 공동체는 결국 문을 닫았고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오클랜드로 올라와 살던 그는 1972년 10월 22일 심장마비로 세상과 작별했다. 오랜 세월 왕따를 당한, 그리고 스스로 왕따가 된 그는 마침내 완전한 자유인이 됐다. 죽기 며칠 전 식탁 의자에 앉아 쓴 <오드 투 오클랜드>(Ode to Auckland, 오클랜드를 위한 송시)가 그가 이 땅에서 쓴 마지막 시였다. 제임스 백스터의 시는 그가 죽은 다음 시집으로 묶여 나왔다. 

 ‘너무 일찍 태어나 빛을 보지 못한 문학 천재’라는 평을 받은 그는 지상 유토피아로 건설하려했던 옛 예루살렘 생활공동체 땅에 마오리식으로 묻혔다. 

 그의 부고를 들은 많은 사람이 신문 광고란에 추모하는 글을 올렸다. 글 끝에는 ‘제임스 키어 백스터-내 친구’(James K Baxter-Friend)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다.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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