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4 ; 방송인 - 모드 배셤 (Maud Bas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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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를 만든 사람들 50인의 위대한 키위 이야기 34 ; 방송인 - 모드 배셤 (Maud Bash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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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년 8월 30일~1963년 7월 14일>


“굿모닝 에브리바디?”" 한마디로 온 국민 정겨운‘소통’


“굿 모닝 에브리바디?(Good Morning, Everybody?)”

 데이지 아줌마의 목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를 일컬어 

‘데이지 체인’(Daisy Chain)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150cm에 불과한 아주 작은 아줌마였지만 영향력은 그 누구와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컸다. 한평생 삶을 즐겁게 살아온 데이지 아줌마를 

뉴질랜드 역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작은 거인, 데이지 아줌마’로



라디오’하면 먼저 생각나는 것은 정겨움이다. 세상 돌아가는 갖가지 일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해 준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 사람들은 라디오를 들으며 웃고 울었다. 라디오는 또 다른 세상과 나를 연결해 준 ‘소통’이었다. 
 
물론 지금도 라디오는 훌륭한 소통의 도구다. 하지만 전과 견주어보면 정겨운 맛은 많이 사라졌다. 게다가 텔레비전을 넘어 DVD, 유튜브 같은 곳에서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는 볼거리가 ‘소리의 맛’을 삼켜버렸다. 한 가족이 오순도순 둘러앉아 라디오 드라마를 듣거나 퀴즈 프로그램을 침을 말려가며 듣던 추억이 아득한 옛날처럼 다가온다.


‘라디오의 영부인’으로 불러

 모드 배셤(Aunt Daisy, ‘데이지 아줌마’라 부른다)은 뉴질랜드의 보배였다. 데이지 아줌마가 있어 세상은 즐거웠고 하루하루가 신이 났다. 같은 하늘 아래에서 세상을 산 사람들이 그를 잊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라디오의 영부인’(The First Lady of Radio), 데이지 아줌마 얘기다.
 모드 배셤은 1879년 8월 30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세례를 받자마자 이름을 데이지(Daisy, 아래부터 데이지)로 바꿨다. 오빠 하나, 언니 둘과 함께 행복한 어린 날을 보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데이지 가족은 몇 해를 더 버티다가 결국 이민 길에 올랐다. 열 살 때 일이었다.
 멀고 먼 여행 끝에 도착한 곳은 뉴플리머스였다. 데이지는 그곳에서 중등학교 시절을 보낸 뒤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했다. 4년 교과 과정을 3년 만에 끝낸 데이지는 교생 실습을 거쳐 정식 초등학교 교사가 됐다. 늘 발랄하고 남 가르치길 좋아하는 성격에 딱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데이지는 1904년 토목 기사 프레더릭(Frederick)과 결혼해 세 아들딸을 얻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그가 누린 또다른 기쁨은 아들딸 또래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남편 직업 때문에 집을 자주 옮겨야 했다. 그때마다 데이지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함께 노래를 불렀다. 
 1908년 <메시아> 공연에서 콘트랄토(테너와 소프라노의 중간, 여성이 낼 수 있는 가장 낮은음) 솔로를 맡은 뒤 그의 진가가 천천히 드러났다. 하지만 어린아이 셋을 키우느라 사회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마흔여덟에 노래로 라디오 데뷔
 
세월은 흘러 데이지도 사십 대에 접어들었다. 삶에 완숙미를 더해갈 때, 웰링턴에 있는 한 방송국에서 그를 불렀다. 담당자는 노래 한 곡을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실험방송에 데이지 목소리를 전파에 실어보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때 데이지 나이는 쉰 고개를 눈앞에 둔 마흔여덟이었다.
 1926년 오클랜드에 있는 라디오방송국(1YA)에 취직했다. 거기서 듀엣 또는 트리오로 노래를 부르거나 유명 작곡가가 만든 새 노래를 방송에 흘려보냈다.
 어느 날 뜻하지 않은 기회가 데이지에게 찾아왔다. 어린이 프로그램을 맡은 담당자가 2주간 휴가를 가게 되면서 그 소임을 맡게 됐다. 대타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 낸 그에게 사람들은 ‘데이지 아줌마’(Aunt Daisy)라는 애칭으로 성원을 보냈다.
 데이지가 왕성하게 방송 일을 할 무렵 세계는 경제공황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 여파는 뉴질랜드까지 미쳤다. 남편도 일터를 잃었고 데이지는 남편 몫까지 벌어야 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옮긴 곳이 웰링턴에 있는 2YA였다. 거기서 데이지는 전문 방송인으로 자리 잡는다. 뮤지컬과 어린이 프로그램을 맡았는데, 자기 전공을 잘 살린 셈이었다. 그 뒤 몇몇 사설 방송국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입지를 더욱 단단히 다져 나갔다.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 받기도
 
그즈음 국민당과 노동당에서 러브콜이 들어왔다. 데이지는 단번에 전혀 관심이 없다고 했다. “음악보다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이 거절 이유였다.
 1936년 데이지는 하늘을 찌를 만큼 몸값이 높아져 있었다. 아침 아홉 시 주부를 대상으로 한 <프렌들리 로드>(Friendly Road)에서 그는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줬다. 이 프로는 요리법, 삶의 지혜, 오늘의 명상 같은 여러 순서로 꾸며졌다. 때로는 연극이나 뮤지컬 평을 하기도 하고 짧은 설교를 하기도 했다. 데이지는 만능 진행자였다.
 그 가운데 많은 청취자의 귀를 세우게 한 건 상품 소개 시간이었다. 데이지가 고른 상품은 나오는 순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아침에 알려준 물건이 오후가 되면 다 팔려나갈 정도였으니 데이지의 영향력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때 특정 상품을 공식 석상에서 방송으로 광고하는 건 금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데이지만은 예외였다. 자기가 직접 써보고 100% 만족한 물건만 추천해 신뢰도에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가 추천하는 물건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그렇다고 그는 돈을 받거나 개인 친분으로 상품을 소개하지 않았다. 
 데이지는 책도 10여 권 펴냈다. 주로 요리법과 관련한 책이었다. 워낙 유명 인물이라 책이 나올 때마다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당연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국에 친절 대사로 파견
 
데이지 아줌마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엄청나게 빠르면서도 정확한 발음으로 프로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1분에 175~205개의 단어를 쏟아냈다. 그렇게 속사포와 같이 말을 토해내면서도 분명하게 뜻을 전달해 많은 청취자의 귀를 사로잡았다. 
 데이지는 2차 세계대전 중 친절대사(Goodwill Ambassador) 자격으로 미국을 찾아갔다. 뉴욕포스트(New York Post)는 그를 ‘지구 반대쪽에서 온 발전기'(The Dynamo from Down Under)라고 했다. 데이지 말발은 지구 반대쪽에서도 인정받았다.
 1963년 7월 14일 여든넷의 나이로 데이지는 세상을 떠났다. 많은 키위가 그때까지 데이지 나이를 몰랐다. 아니 어쩌면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소리로 듣는 데이지 아줌마만으로도 충분했던 까닭이었다.
 죽기 며칠 전까지 마이크를 놓지 않았던 데이지는 방송을 시작할 때마다 늘 이런 첫 말로 방송을 열었다.
 “굿 모닝 에브리바디?(Good Morning, Everybody?)”
 데이지 아줌마의 목소리를 듣고 자란 세대를 일컬어 ‘데이지 체인’(Daisy Chain)이라는 말까지 생겼다. 150cm에 불과한 아주 작은 아줌마였지만 영향력은 그 누구와 견줘도 뒤지지 않을 만큼 컸다. 한평생 삶을 즐겁게 살아온 데이지 아줌마를 뉴질랜드 역사는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작은 거인, 데이지 아줌마’로.


글_박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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