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6) 고린도후서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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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16) 고린도후서 5:1~7

우리가 지난 주에 부활주일을 지냈습니다. 사순절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하면서 약 6주간의 시간을 지내고, 부활의 감격으로 우리 주님 앞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럼 끝인가요? 함께 부활란 나누고, 쵸콜렛 나누고, 그러면 끝인가요? 부활의 기쁨은 영원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받으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의 죽음을 향해 쏜살과도 같은 시간을 달려가고 있지만, 우리의 마지막은 결국 부활의 새아침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언제나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부활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제목과 같이 “믿음으로 행하는 자”의 삶입니다.우리가 끊임없이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영광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나누고, 내 안에 새기고, 더불어 그 속에 담겨진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보는 것으로 행하는 삶을 넘어서서,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볼 줄 아는 삶, 즉 믿음으로 행하는 삶을 위해서입니다.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인줄 믿습니다. 저 천국의 소망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믿음으로 행하는 자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줄 믿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인줄 믿습니다. 저 천국의 소망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 믿음으로 행하는 자의 삶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참된 소망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기독교의 3대 가치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이 제일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이기에 사랑이 제일입니다. 그 사랑으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주셨습니다.우리는 믿음으로 출발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 가운데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내 것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소망은 무엇인가요?하나님의 사랑과 우리의 믿음을 연결시켜주는 고리가 바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데, 구원의 완성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삶의 과정 가운데 필요한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라고 고백한 것은, “나 이제 죽을 날이 다 되었다.”라는 절망적인 선언이 아니라, “드디어! 내가 저 천국으로, 저 예수님 앞으로 갈 때가 되었다. 육신의 로프를 풀어라. 내 삶의 장막을 걷어라. 이제 하나님께로 가자!”라는 소망의 선포입니다. 오늘 본문도 동일한 의미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면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세워질 것이다.” 인간의 죽음은 잠시 머무는 이 땅의 장막을 걷어내는 것이요, 동시에 저 하나님 예비하신 천국으로 향하는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에서는 죽으면 끝이요, 영원한 이별이요, 절망이라고 말하지만, 우리 믿는 자에게 죽음은 천국의 문을 여는 순간이요, 육신의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완전한 자유를 경험하는 날이요, 하늘의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예비되어 있음을 실로 깨닫는 영광의 날이 됩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백성으로 천국의 소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에 나도 동참할 수 있다는 믿음 가지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소망입니다.세상의 헛된 것에 대한 소망은 가지면 가질수록 결국에는 나를 절망으로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참된 소망을 가진 자, 그 소망이 나를 살아있게 합니다. 그 소망이 나를 붙잡아 줍니다. 참된 소망으로 주님 앞에 이르는 그 순간까지 흔들림 없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전에는 그런 질문이 한창 유행인 적이 있었습니다. 중고등학교 수련회에 가면,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면, 연합집회를 하면, 언제나 강사목사님들이 묻곤 했습니다. “당신은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요즘은 이런 질문 잘 안하지만, 제가 한 번 여쭤볼까요? “여러분! 오늘 죽어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가 아멘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우리는 늘 우리 자신의 행위를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면서 무슨 구원을 받아. 이게 구원받은 자의 모습이냐?” 이게 어떻게 보면 겸손의 표현인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교만함이요 불신앙이기도 합니다.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내 의로움 가지고, 내 지식이나 능력 가지고 쟁취하는 게 아닙니다.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숨잖아요. 나중에 하나님께서 부르시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우리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그런데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만든 옷이 영원할 수 있나요?인간의 힘으로 만든 무화과나무 옷이 상징하는 것이 내 행위입니다. 내 능력, 내 도덕적인 기준, 내가 추구하는 의로움, 거룩함, 그것으로 죄를 가리우고, 구원을 얻어보겠다는 거예요. 하지만 그게 가능한가요? 잠깐은 되는 것 같은데, 곧 말라버리고 맙니다.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 옷을 입혀주십니다. 가죽 옷을 입히셨다는 것은 이미 어떤 짐승이 감당한 피의 희생이 있었다는 뜻이 되죠. 이건 하나의 상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려 죽으심으로 대속의 어린 양 되심이, 창세기 최초의 범죄 속에 이미 예비되어진 것입니다. 


오늘날, 여전히 무화과나무를 엮어 옷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나는 그런 것 상관없다고 하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른 채 벌거숭이로 살아가는 이들도 있습니다.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새로운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새로운 생명의 옷을 입으셨습니다. 영생의 옷을 입으셨습니다.믿음으로 “아멘”하며 나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새로운 옷을 입혀주십니다. 죄 사함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영생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부활의 옷을 입혀주십니다. 그러면 더이상 부끄러워 하거나, 나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두려워 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의 영광으로 지으신 새로운 옷, 구원의 예복을 입고 주님 나라에 이르는 믿음의 확신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성령께서 보증해 주십니다. 


복음의 진리는 단순합니다. 세 단어면 끝입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 초대교회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제자들이 전한 메시지는 이거 하나였습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 – 예수님을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하지만 그는 부활하셨다.”우리는 믿음의 백성으로서, 이미 앞서 나눈 말씀과 같이 천국의 소망과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새로운 옷,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구원의 옷을 입고, 담대함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성령께서 보증해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보증이라는 말이 총 15번 나옵니다.고린도후서 1장에 보면 “우리를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본문에도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말씀하죠. 에베소서 1장에도 “성령께서 구원의 보증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6장과 7장에는 각각 하나님께서, 또한 예수님께서 “언약의 보증이 되셨다.”고 말씀합니다.앞서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말씀드렸죠. 사탄 마귀는 늘 우리를 향해서 참소합니다. “네가 그러고도 하나님의 자녀야?” 스스로 낙심하게 만들고, 때로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도 낙심하고 시험에 들게 만듭니다. 자꾸만 내 안에 있는 구원의 확신을 무너지게 만듭니다.그게 사탄 마귀의 방법이예요. “네가 뭘 할 수 있어? 네가 어떻게 구원을 받아? 네가 무슨 그리스도인이야?”우리가 구원의 확신, 믿음의 백성으로서의 담대함을 갖게 되는 것 역시, 사탄의 참소를 찢어버리고, 성령의 보증을 받을 때에 시작됩니다. 로마서 8장 16절에 말씀합니다.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성령께서 보증이 되어 주십니다. 내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의 보증이 되십니다. 사탄 마귀의 참소 앞에서 “내가 보증한다.” 나를 변호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정말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 받나요?” 연약한 믿음으로 의심하는 우리에게 “내가 보증한다.” 확실한 약속을 말씀하십니다.그럼 만약에 내가 구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책임을 누가 지셔야 하나요? 성령께서 대신 지셔야 합니다. 성령께서 가만히 계실까요? 내가 누군가를 보증했으면, 그 사람이 잘 되길 바라지 않겠습니까? 성령께서 나의 구원의 보증이 되셨으면, 내가 믿음을 잘 지켜 천국에 이를 때까지 성령께서 나를 붙잡아 주시지 않겠습니까?그래서 로마서 8장 26절에 말씀합니다.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께서 우리가 바른 삶을 살아가도 간절하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면서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 나의 영원하고도 확실한 보증이 되어 주심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부활의 기쁨과 천국의 소망, 구원의 확신 가지고, 언제나 믿음으로 행하는 자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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