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58)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58)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 <히브리서 11:33~40>

오늘 본문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이라고 불리웁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십자가 부활을 향한 믿음, 즉 구원에 이르는 믿음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즉 삶적인 측면의 믿음,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절에 보면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11장 1절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여기 보면 두 개가 하나의 쌍을 이룹니다. “바라는 것들”과 “보지 못하는 것”이 한 쌍이고, “실상”과 “증거”가 한 쌍입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뭐냐? 믿음은 내가 지금 당장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거예요. 보세요. 오늘 본문은 특별히 말씀 자체가 주는 힘이 있습니다. 말씀 자체가 주는 능력과 감동이 있습니다. 그 은혜를 마음에 새기며 함께 읽어보고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서 4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런 말씀을 읽을 때에 우리 안에 뜨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결단이 타올라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오늘 말씀과 같이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 부활의 믿음으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확고한 믿음, 그리고 그에 합당한 믿음으로 살아가겠다는 결단. 이를 통해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믿음으로 역사를 이루어갑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보면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웠던 수많은 일들을 믿음으로 감당해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것이 다 믿음의 역사입니다. 

사실 세상에서도 보면, 도저히 할 수 없을만한 일을 감당해내는 사람들을 보곤 합니다. 그 안에 있는 어떤 의지라던가, 성공을 위한 도전정신 등으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역사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1953년 고 정주영회장의 일화입니다. 유엔군 사령관은 “묘지에 푸른 잔디를 깔아주시오.”라는 입찰 공고를 냅니다. 당시 묘지는 흙바닥에 십자가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입찰에 응한 업체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가 한겨울이었기 때문이죠. 5일이 남은 시점에 정주영회장이 유엔군사령관에게 말합니다. “푸르기만 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렇다는 확답을 받고, 공사비 3배를 요구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보리밭을 매입해서, 보리밭에 있는 새싹을 다 가져와서는 유엔군 묘지에 심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한겨울 황량한 흙바닥이 푸른 묘원으로 바뀌었습니다.이건 순전히 한 사람의 의지와 자신을 향한 믿음이 만들어낸 역사입니다. 


한 사람이 자기 자신을 향한 확고한 믿음과 의지만 있어도 큰 역사를 이루곤 합니다. 보세요.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연약한 중에도 강하게 됩니다. 믿음으로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옥에 갇히는 고난을 감당해냅니다. 믿음으로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칼로 죽임을 당하는 일을 감당합니다. 

여기 본문에 언급한 것은 히브리서 기자가 상상력으로 써낸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직접 겪은 일들입니다. 그에 앞서 히브리서 11장 전체에는 믿음으로 역사를 일으킨 수많은 인물들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런데 이 모든 믿음의 역사 중에 가장 큰 역사가 있습니다. 어떤 것일까요?  오늘 믿음의 역사, 더불어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진 한 사람으로 변화되는 그 역사를 위해서입니다. “저 믿음의 역사를 이룬 선진들을 바라보았으면, 너희들도 믿음으로 살아가라.” 저들이 이룬 역사가 아니라, 내가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 이게 가장 큰 믿음의 역사라는 사실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성품이 변화되는 것이 가장 큰 믿음의 역사입니다. 내 죄악의 쓴뿌리가 뽑혀지는 것이 가장 큰 믿음의 역사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역사를 통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믿음으로 최후 승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3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기서 오늘 말씀의 제목이 나왔죠.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앞서 믿음으로 수많은 고난의 역사를 감내해낸 사람들의 모습을 나열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건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믿음의 인물을 바라볼 때의 모습입니다. “야! 저 사람들 믿음을 가지고 저렇게 살아가는데, 나는 못해. 나는 저렇게 할 수 없어.” 그런데 이 안에는 반대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말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경고하십니다. “너희들이 고난을 당할 것이다. 핍박을 당할 것이다.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또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여러차례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어려움을 당할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고를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잘 감당해내라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의 어려움에 넘어지지 말고, 끝내 이겨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삶을 살아갈 때에 세상은 계속 비난합니다. 잘 해도 비난을 합니다. 물론 못하면 훨씬 더 많이 비난을 합니다. 예전에 한국에서 한창 코로나 때 교회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까?  그러다가 나중에 모든 통계 수치를 내놓고서는 “교회 때문에 코로나가 확산 된 것은 아닙니다.” 정부에서 발표까지 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무너진 이미지는 회복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참고 견디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뿐입니다.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답답해도, 억울해도, 힘겨워도 믿음으로 산다는 게 그런 겁니다. 


오늘 믿음의 선진들은 어떤가요? 한결같이 다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위기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게 다 믿음으로 최후 승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리적선언 여덟가지 항목이 있는데, 마지막 여덟 번째가 이겁니다. “우리는 의의 최후 승리와 영생을 믿노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담대히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지금 어려워도, 지금 힘겨워도, 지금 감당할 수 없어도, 그래서 지금 주저앉아 울고 싶을지라도 믿음이 있으면 일어설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참아내야 합니다. 이겨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오늘의 모든 아픔을 이겨내고, 최후 승리를 얻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믿음으로 더 좋은 것을 바라보고 이루어갑니다. 


한국의 경상북도 문경에 가면 ‘신망애육원’이라는 고아원이 있습니다. 1954년 12명의 전쟁고아들과 함께 시작된 곳으로 현재까지 이 고아원을 거쳐간 아이들은 800명이 넘습니다.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국가적인 지원도 전무하였습니다. 이런 황용석장로님에게는 일생의 좌우명이 있었습니다. 신망애육원 정문의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글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 


이게 바로 믿음으로 더 좋은 것을 바라보고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망애육원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이런 글이 쓰여 있습니다.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반드시 하실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기에 고백할 수 있는 거예요. 고아들에게 전할 수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도 보면 마지막 39절과 40절에 말씀합니다. 저들은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된 것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예비된 것을 받아 누려야 비로소 온전함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약속을 받았지만, 그 약속의 성취를 보지는 못한 이들입니다. 어떤 약속인가요? 메시야의 약속입니다. 저들은 믿음으로 살아갔습니다. 믿음의 증거를 삶 속에 드러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저들보다 더 복된 것이 있습니다. 저 믿음의 선진들은 약속은 받았는데, 실체는 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실체를 마주하였고,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천국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럼 저들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으니 구원 받지 못했나요? 저들의 시대에는 양의 피가, 소의 피가, 염소의 피가 대신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약속의 성취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에, 그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 하나만을 의지함으로 구원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더 이상 성경의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부러워할 것이 없습니다. 영적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 따라하겠습니다. “오늘은 틀림없이 좋은 날이다.” 오늘만인가요? 내일도, 모레도, 더 나아가 나의 오늘만이 아니라, 내 자녀손들의 오늘도 내일도 믿음으로 살아갈 때에, 틀림없이 좋은 날이 될 줄 믿습니다. 더 좋은 것을 바라보고 이루어가는,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믿음의 주인공으로 인정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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