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3)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마태복음 16:21~28>

수백만명을 감동시킨 사람을 감동시킨 그 사람”이라는 별명을 가진 헨리 무어하우스라는 설교자가 있습니다. 수백만명을 감동시킨 복음전도자, 무디를 만나게 됩니다. 헨리 무어하우스는무디에게무디의 교회에서 설교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을 했지만, 무디는 유약해보였던 헨리라는 젊은 복음전도자를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거듭된 부탁에, 자신이 교회를 비우게 되는 목요일과 금요일 저녁에 있을 작은 기도회에서 헨리에게 설교를 맡겼습니다. 

  

토요일에 교회로 돌아온 무디는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아내에게 물었습니다. “헨리가 말씀을 잘 전했나요?” 그러자 아내는 무디에게 말했습니다. “헨리는 두 번의 설교 모두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지고 말씀을 전했는데, 큰 은혜가 되었어요”   무디는 아내의 말에, 토요일 저녁에도 헨리에게 설교 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헨리 무어하우스는 그날도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본문으로 하여, 수많은 성경 이야기를 들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전했습니다. 헨리는 여섯째 날까지 계속해서 똑같은 본문, 요한복음 3장 16절을 가지고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일곱 번째 날이 되었을 때에, 회중들은 헨리가 어떤 본문을 가지고 설교할지 궁금했습니다. 설교단에 선 헨리는 말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본문으로 설교하고자 많은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좋은 본문을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입니다.”  무디는 헨리 무어하우스의 설교를 듣고 너무나도 큰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헨리는 하나님의 사랑만을 일관되게 전하였고, 그 속에서 무디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위대함을 가슴 깊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헨리 무어하우스 “수백만명을 감동시킨 무디를 감동시킨 그 사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실현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삶과 죽음의 목적을 담은 말씀입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로서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의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심으로 얻은 구원받은 자로서의 생명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사순절 이 절기에,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주신 바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내 생각의 방향성을 잘 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보면,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6장 16절 말씀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매우 흡족해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대제사장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항변하며 말합니다.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여기 보면 두 가지 영역의 대립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 우리도 늘 이 둘 사이에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예수님은 생각의 방향성에 대해 지적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의 방향성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일이 뭔지, 사람의 일이 뭔지부터 알아야겠죠.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앞서 언급한대로 생각의 방향성입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보호하는 베드로를 향해 “사탄아! 물러가라.” 이렇게 강력한 어조로 책망하십니까? 베드로의 생각의 방향성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따라다녔는데, 예수님은 능력도 있는 분인데, 이제 곧 한 자리 차지할 일만 남았는데, 예수님이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고요? 말도 안돼.” 그래서 막아서는 거예요.앞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막아서면서 “항변하였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 말의 원어적인 의미를 보면 예수님을 향해 “꾸짖었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내 생각의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어떤 일을 해도 그 안에 담겨진 의도가 중요합니다. 교회에서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사람의 일에 머물수도 있고,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생각의 방향성이 언제나 하나님의 일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드리는, 나의 일상의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첫 번째에서 말씀드린 것이 생각의 방향성, 내 안에 품은 의도라고 한다면, 두 번째 말씀은 내 삶의 직접적인 모습, 행태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바른 삶의 방향성을 말씀하는데, 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 세 가지 단계가 나옵니다. 먼저 “자기를 부인하고”, 그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제서야 비로소 “나를 –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 그럼 이 세 가지 중에 제일 힘든 게 무엇일까요? “자기를 부인하는 것, 입니다. 다들 십자가는 열심히 지는데, 때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한채로 십자가를 지다보면,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일들이 생겨나곤 합니다. 

  

초대교회 때 사용하던 말 중에, 아디아포라와디아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디아포라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해도 좋고 안해도상관 없는 것들입니다. 반면에 “디아포라”는 “명백한 규정”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이야기 들어보셨죠. “구원에 관한 것이 아니면, 논쟁하지 마라.” 이게 디아포라와아디아포라입니다. 성경에도 말씀하죠.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라.” 성경에서 명백하게 규정한 것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해서는 서로간의 자유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지난 수요일에도 잠깐 언급드렸는데,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 중심적입니다. 저부터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본성을 잘 제어하고 통제할 줄 아는 사람을 향해 “인격적이다, 훌륭하다, 성품이 좋다.”라고 하면서 존경합니다.  

  

반대로 자기 중심적 사고를 여과없이 드러내는 사람을 가르켜서 “꼰대다. 꽉 막혔다. 말이 안통한다. 만나기 싫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중심적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좁은 속을 넓혀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십자가는 이미 다 잘 지고 계십니다. 주신 사명들 열심 다해 감당하고 계시잖아요. 그 사명 감당할 때에, 서로간에 조금만 더 배려하고 포용하고 인정하고 수용하고 용납하고 격려하고 품어주고 감싸주고 안아주고, 이를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잘 따라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주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첫 번째에서는 생각의 방향성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라.” 두 번째는 내 삶의 행태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라.” 마지막 세 번째 “주님 나라를 향한 소망”은 무엇인가요? 내 가슴 속에 늘 품고 살아가야 할 에너지입니다. 구원의 확신, 하늘의 상급입니다.


예수님은 25절과 26절에 영원한 생명에 관한 말씀을 주십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 말씀하신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이라는 말에 담긴 의미는 그저 육체적으로 살고 싶어서, 생명을 유지하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또는 내 의지와 감정, 한 마디로 “내 거”를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 한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앞서 언급한 자기 부인과 상반되는 모습인 거죠.

 

다시 말해, 자기를 부인할 수 있다면, 자기 중심적인 사고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내 거”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참된 생명을 얻을 수 있음을 선포하십니다.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모세를 붙잡고 붙잡았으면, 도리어 모세는 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세를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 모세를 건져주시고, 붙잡아 주시고, 살게 하시고, 모든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는 역사를 감당하게 됩니다.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4절과 25절에 말씀합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나아가 본문 27절에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말씀합니다. “예수님 죽으시면, 지금껏 예수님을 따라온 우리들은 뭐가 됩니까?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음에 인간적인 걱정을 품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서 그 마음까지도 헤아리시고 말씀하십니다.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 나라를 향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는 영생의 소망이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도 있습니다. 천국의 기쁨도 있습니다. 하늘의 상급도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소망으로 우리 안에 품을 때에,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힘있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는 주를 믿는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받은 바 주의 사랑에 감사하며, 내게 맡기신 주의 십자가 사명 넉넉히 감당하여,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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