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5) 예루살렘 입성에 담긴 은혜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65) 예루살렘 입성에 담긴 은혜 <마태복음 21:1~11>

오늘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스가랴의 예언의 말씀대로 나귀를 타시고 성에 들어가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겉옷을 펼치고, 종려나무가지를 깔아 길을 만듭니다. 또한 손에 종려가지를 흔들며 본문 9절의 말씀과 같이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고등학교 때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갔습니다. 그때는 등산로 곳곳에 음료수를 파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산을 올라가면 갈수록 가격이 비싸집니다. 왜 가격이 비싸질까요? 장사하는 분들이 등짐으로 음료수를 몇 박스씩 짊어지고 올라갑니다. 그분들의 땀과 수고가 더해져 가격이 비싸지는 거예요. 음료수는 한 게 없습니다. 음료수는 그저 사람의 등에 올라앉았을 뿐인데, 올라갈수록 값어치가 달라집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 자체로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업고 오르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우리는 죄 사함을 받았고, 구원 받은 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등에 엎혀있었던것 뿐인데, 죄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의 존재 가치가 달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의 자녀된 우리를 위해, 지금 우리가 힘겹고 아픈 삶을 살아갈 때마다, 다시금 우리를 업고 그 길을 걸어가십니다. 내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나로 인해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기에, 나란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나”라는 십자가를 지고 죽임 당하시고자 오르신 그 길이 골고다 언덕길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 종려주일,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담겨진 그 은혜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며 감사하는 시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첫 번째로, 쓰임 받을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종려주일의 대표적인 설교 제목이 있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런데 “주가 쓰시겠다 하라”의 주인공이 누군가요? 사람이 아니라, 나귀입니다. 

벳바게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3킬로미터 정도, 성인 남자가 천천히 걸어가도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입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이 길을 걸어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나귀를 준비시키십니다. 예언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왕으로 입성하시면 말을 타야 폼이 나실텐데, 나귀새끼를 타십니다. 나귀가 평화의 시대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예언의 성취와 더불어 평화의 왕으로서, 또한 겸손의 왕으로서 나귀를 타십니다. 하지만 그 걸음은 결코 초라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환영합니다. 

  

그런데 그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환영을 받는 존재가 있었으니,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있는 나귀였습니다. 나귀가 대단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등에 태운 것 뿐입니다. 그랬더니 나귀의 존재 가치가 달라집니다. 여러분! 나귀의 이미지가 어떤가요? 나귀는 등 기준으로 키가 130cm정도입니다. 서 있는 사람과 그렇게 차이가 많이 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나귀는 “동키”라고 불리우며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귀가 예수님을 등에 태웠더니, 레드 카펫을 밟습니다. 나귀 한 마리도 이렇게 귀하게 쓰임 받았는데, 우리는 과연 얼마나 주님께 쓰임을 받고 있는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쓰임 받을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엄청난 축복을 받는 것, 기도하는 모든 것이 응답되어지는 것, 우리는 때로 이런 것만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 큰 은혜는 내가 주를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나귀 한 마리, 예수님을 등에 태웠더니, 그 존재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나귀 뿐이 아닙니다. 오늘 바닥에 깔렸던 종려나무도 있습니다. 그 종려나무 가지도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을 위한 걸음에 쓰임 받았습니다. 나귀를 풀어오려고 달려갔던 두 명의 제자도 쓰임 받았습니다.  나를 불러주심이 은혜입니다. 나를 사용하여 주심이 은혜입니다.내가 쓰임 받고 싶다고 다 쓰임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언제나 어디서나, 내 작은 헌신의 모습으로, 주의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은혜를 감사함으로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찬양 드릴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무리들은 예수님을 향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으로 시편 118편 25절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어서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말도 있죠. 이 안에 담긴 뜻은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이 땅에 오셨음을 선언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사실 이러한 외침에는 모인 사람들의 오해도 담겨 있습니다. 저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이스라엘 나라의 재건으로 생각했거든요.  그렇기에 후에 보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던 찬송이, “예수님을 십자가게 못 박으소서.”라는 분노 섞인 외침으로 바뀌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구원의 역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에 묶인 우리들에게 죄 사함의 은혜를 허락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주시기 위한 참된 구원입니다. 

  

그럼에도 어찌되었건 저들은 모두 주를 찬양합니다. 지금 예수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벳바게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그 여정을 계속 따라가면서 예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립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뒤섞여 있었기에, 한 시간이 훨씬 넘게 걸렸을 것입니다. 저들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담긴 바른 영적인 의미을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했음에도,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다 알고 있습니다. 저들은 의미가 무엇인지도 제대로 모르면서도 그렇게 힘을 다해 찬양을 올려 드렸는데,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에 담긴 온 인류를 향한 구원의 계획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주를 찬양해야 할까요? 


주를 향한 찬양의 특권을 돌들에게 빼앗겨서야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찬양 드릴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찬양은 주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 한 시간의 예배 시간에도 내 온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님께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합니다. 찬송할 때는 힘을 다해 찬송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는 전심으로 내 마음을 담아야 합니다. 설교 시간에는 아멘으로 화답하여 주의 말씀을 내 안에 새겨야 합니다. 그게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하나님 찾으시는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찬양의 대상은 우리 주 하나님 한 분 뿐인 줄 믿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입술로, 우리의 연약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음이 은혜인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주를 찬양할 수 있는 은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참된 소망을 품을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여러분! 소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소망은 오늘을 살아가게 하는, 나아가 오늘을 견뎌내게 하는 힘입니다.  “살다보면”라는 노래의 가사 전체를 보면, 다 내일을 향한 소망을 그린다고 하면서도, 또 한 편 그래도 오늘도 좀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이 나옵니다. 소망이라는 것이 미래적인 것이지만, 그러면서도 모두 다 그 미래가 너무 멀지 않기를 바란다는 거예요.  우리가 교회에서도 소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오늘 소망을 품고 내일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오늘 기도하고 내일 응답되길 원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말씀하죠.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소망이죠. 오늘 당장 구원의 때가 이루어지길 원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의 삶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저 멀리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거 말고 당장의 물질적인 풍요, 당장 내 자녀의 입시와 진학과 결혼, 당장 내가 계획하고 소원한 것이 지금 이 순간 성취되기만을 원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품어야 할 참된 소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며, 주님 앞에 서는 그 순간까지 믿음을 잃지 않고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이게 바로 참된 소망입니다. 

  오늘 설교 후에 부를 찬송은 이러한 참된 소망을 노래합니다. 찬송가 481장, 제목은 “때 저물어서 날이 어둠이”입니다. 본래의 영어 제목이 더 은혜가 됩니다. “Abide with me – 나와 함께 하소서.”  이 찬송을 작사한 분은 헨리 라이트라는 영국성공회 신부입니다. 그는 투병 중에 있는 헌트 신부를 만나게 되는데, 헌트 신부는 헨리에게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살 것을 권면하면서, “Abide with me – 나와 함께 하소서.”라는 말을 전하고 소천합니다. 이 말을 깊이 간직하고 목회를 하던 헨리 라이트 신부는 어느날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됩니다. 자기 딸에게 “Abide with me”라는 시를 써서 남기게 됩니다.  남겨진 시는 헨리 뭉크라는 작곡가에 의해 곡조가 붙게 됩니다.  찬송의 가사를 보면, 우리 주님께서 언제나 어떠한 상황 속에서나 나와 함께 하심을 향한 굳건한 믿음, 더불어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참된 소망이 깊이 담겨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소망을 품을 수 있음이 은혜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예수님의 피의 공로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참된 소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종려주일, 고난의 한 주가 시작됩니다. 우리 삶에도 고난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지만 주의 십자가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로 이어집니다. 영원한 천국의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이 사실을 깨달아 알 때에, 오늘 우리는 기다릴 수 있고, 오늘 우리가 다시 힘을 낼 수 있고, 오늘 우리는 내일의 부활의 아침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소망 가지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Abide with me – 나와 함께 하소서.” 이러한 참된 소망의 고백을 가슴에 품고, 주님 만나는 그날까지 담대하게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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