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82) 신앙의 획을 긋는 사람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82) 신앙의 획을 긋는 사람 <열왕기하 23:21~25>

‘호사유피 인사유명 –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고사입니다. 이와 비슷한 일화들이 많이 있죠. 우리나라 고려말, 조선초기에 있었던 하여가와 단심가로 표현되는 사례도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이름을 남겨야 할 것인가? 성경 속에도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는 좋은 의미로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지만, 좋지 않은 의미로 이름을 남긴 사람도 있습니다. 사모할만한 이름으로 남은 사람도 있는가 하면, 저주의 이름으로 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의 지난 날의 삶 속에도 기억에 남는 이름들이 있죠. 어떤 의미로서의 이름을 남길 것인가?  하나님 보시기에 나는 어떤 신앙인으로, 어떤 모습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로 기억될 것인가? 이 모든 것은 오늘 나의 삶의 걸음이 쌓이고 쌓여져 만들어집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신앙의 획을 긋는 사람’이라고 잡았습니다. 성경 속에 보면 신앙의 삶에 있어서 정말 획을 그었다고 할만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세계 기독교 역사 속에도 획을 그었다 인정될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역사 속에도 한 획을 그었다고 할만한 사람도 있습니다. 혹 그정도는 아닐지라도 우리도 나 자신의 신앙의 삶에 있어서 작은 획 하나 정도는 그을 수 있으면 어떨까하는 기대도 갖게 됩니다. 이 역시도 오늘의 나의 삶, 신앙의 삶을 통해 만들어져가고 있는 중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기쁨이 되는 삶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서로간에 참으로 유익한 기억을 남길만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들의 이름이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겨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한 획을 긋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완전한 정결함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은 남유다의요시야왕입니다. 요시야는여덟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31년간 남유다를 통치합니다. 그리고 남유다 역사상 가장 선한 왕으로 기록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요시야가 가지고 있었던 완전한 정결함이었습니다.


요시야는 남유다에 종교개혁을 일으킨 왕입니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처음에는 행적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18년이 지난 스물 여섯 살의 나이에 첫 번째 행적이 소개되는데, 바로 성전을 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합니다. 잃어버린 채로 수백년이 흐르다가 율법책을 발견하고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유월절을 행하게 됩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절기 중에 가장 중요한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430년 애굽 종살이가 끝나는 자유의 밤을 기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잊혀졌던 그 중요한 절기를 오늘 요시야의 시대에 비로소 다시 지키게 되었습니다. 요시야는 말씀에 따라 유월절을 지킴으로 완전한 정결함을 이루어갑니다. 그리고 끝까지 완전한 정결함을 이루어갑니다.  우리가 보통 유다의 선한 왕이라고 하면 히스기야를 가장 먼저 떠올리죠. 그런데 굳이 비교하자면 히스기야보다요시야가 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선한 왕입니다.  


히스기야의 병 나은 것을 축하하고자 바벨론에서 사신을 보내옵니다. 히스기야는 신이 나서 바벨론 사신에게 궁에 있는 모든 보물들을 보여주며 자랑을 하죠. 이에 이사야 선지자는 “왕이 바벨론 사신에게 모든 것을 다 보여주었으니, 사람부터 보물까지 모든 것이 다 바벨론으로 옮겨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히스기야의 대처입니다. 나중에 나라가 어떻게 되더라도 내 시대에는 평안할터이니 좋다고 대답을 합니다. 결국 그 다음 대인 므낫세는 아주 악한 모습으로 나라를 통치합니다. 


히스기야는 대표적인 선한 왕으로 꼽히지만, 그럼에도 완전하지는 못했습니다. 다음 세대에 선함을 이어가는데도 실패하였습니다.  완전한 정결함이라는 것이 이래서 어렵습니다. 우리도 어지간히 신앙생활 잘 하는 것, 어지간히 믿음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모습으로, 완전한 정결함으로 주님 앞에 서는 것,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추구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더 힘써 노력해야 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일수록 그에 따른 상급도 커지게 됩니다. 언제나 주의 말씀 붙잡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삶을 통해 완전한 정결함을 추구하고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신앙의 한 획을 긋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주의 전을 향한 사모함입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의 버려진 것과 다름없이 취급당하고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성으로 모셔들입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전을 짓고자하는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 밤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에게 다윗에게 전할 말씀을 주십니다.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여호와의 집을 건축하겠느냐?” 여기서 이어지는 말씀이 이른 바 다윗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말씀하시죠.  “내가 언제 너에게 내 집을 지어 달라고 한 적이 있느냐?” 이게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고 하면, 하나님의 감탄과도 같습니다.  다윗이 살던 시대는 성전이라는 것 자체가 없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걸 생각해낸 거예요. 누가 한 걸 따라하는 건 쉬운 일이죠.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을 생각해내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늘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살았더니, 하나님의 전을 건축해야겠다는,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다윗의 마음을 보시고, 다윗의 삶을 보시고, 너무나도 감탄스러운 마음으로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가 언제 너에게 집 지어달라고 하였느냐?” “그런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기특한 생각을 하였느냐?” 그러면서 이어지는 말씀이 다윗 언약입니다. “너를 주권자로 삼고, 위대하게 만들고, 네 후손의 왕위가 영원하게 하고... 이를 통해 네 집을 내가 세워주겠다.” 오늘 요시야도 보십시오. 요시야가 왕위에 올라 18년이 지난 후, 이제 좀 나이도 들어 뭔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 처음 시도한 것이 성전을 보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주의 전을 향한 사모함이 있었기에 율법책을 찾은 것이요, 율법책을 찾았기에 바른 신앙을 위한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마음에도 주의 전을 향한 사모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주의 전을 향한 사모함은 예배를 향한 사모함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할 일이 있을 때에 함께 합력하는 것이 사모함입니다. 함께 교제할 일이 있을 때에 동참하는 것이 사모함입니다.  우리 교회에 매일 새벽예배가 있습니다. 수요예배, 트리니티를 통해 말씀을 공부할 수 있습니다. 금요은혜의 밤을 통해 함께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에 함께 하는 것이 사모함입니다. 주의 전을 향한 사모함으로 예배의 자리에, 기도와 헌신의 자리에, 함께 교제하는 자리에 모이기에 힘쓰는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나의 교회 공동체 활동 속에서도 신앙의 획을 긋는 모습을 가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말씀대로 행함입니다. 


오늘 제목과 같이 ‘신앙의 획을 긋는 사람’ 의미상으로 보면 상당히 거창해보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주 기본에 충실한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전에 아테네올림픽에서 문대성이라는 태권도 선수가 있었습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 선수가 마지막 결승전에서 상대선수를 뒤후려차기 KO승으로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태권도의 발기술이 화려하고 멋지다고 해도, 처음 시작은 서는 것에서부터입니다. 태권도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 첫 번째가 서기입니다. 모든 것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말씀이죠. 

 

 때로 신앙생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합당치 못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 그 기본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 생활은 잘 합니다. 교회의 문제가 뭔지도 잘 아는데, 정작 하나님의 말씀은 모르는 경우가 있더라는 거예요.  디모데후서 3장에 말씀합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신앙의 획을 그을만한 아무리 위대하고 영적인 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함, 그 기본에서 시작됩니다.


요시야의 모든 종교개혁은 말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며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유월절을 행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된 대로 신접한 자와 점쟁이와 드라빔과 우상과 가증한 것을 다 없애버립니다. 그럴 때에 25절의 평가가 나오게 됩니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전무후무, 한 마디로 “신앙의 획을 그은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신앙의 획을 긋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획을 긋는 것은 한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론에 말씀드렸죠. ‘인사유명’ 하지만 죽어서 남겨지는 이름은 죽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살아있는 모든 삶의 결정체입니다.  따라서 오늘도 나의 삶을 통해 또 다른 신앙의 한 획을, 삶의 한 획을 그어가고 있다는 그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면 주의 뜻대로 살아가게 됩니다. 주신 바 말씀을 붙잡고, 신앙의 아름다운 획을 긋는 삶, 내 이름과 함께 아름다운 흔적을 새겨가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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