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94) 믿음의 첫발을 내디딘 아브라함

교민뉴스


 

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294) 믿음의 첫발을 내디딘 아브라함 <창세기 25:7~11>

일요시사 0 13 0 0

지난 10월 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로 인해 대한민국이 떠들썩했습니다. 한국 최초의 노벨문학상인 동시에, 아시아 여성 작가 최초이기도 합니다. 최초, 첫발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타이틀이잖아요. 오늘 본문에도 보면, 첫발을 내디딘 한 사람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시고, 보내시는 장면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의 첫발을 내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175세에 죽어, 자신이 아내 사라의 매장지로 구입했던 땅인 마므레 앞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됩니다. 이 땅에는 후에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까지 장사되고, 그 후에는 갈렙이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하면서 차지한 땅입니다. 본문의 말씀은 아브라함의 죽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함께 나눌 말씀은 아브라함의 전체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 속에서 믿음의 첫발을 내디딘 아브라함은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았는가? 그 믿음의 첫발을 내딛기 위해 무엇을 붙잡고 살아갔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단입니다. 


서론에도 말씀드렸지만, 창세기 12장은 새로운 한 획을 그은 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방주를 통해 다시금 생육하고 번성하는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런데 인간의 본성적인 죄악됨이 또 발목을 잡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들을 지면에 다 흩어버리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이룰만한 인물을 찾으시는데,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2장 1절에 아브라함을 불러 명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반응이 창세기 12장 4절입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라함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런데 앞선 창세기 11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가 이미 그전부터 가족들을 이끌고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이미 가족들과 함께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 속에 어떤 섭리가 있었는지 아브라함은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가 가족들을 다 데리고 이주를 하니까, 그냥 따라 나선 겁니다. 그리고 하란에 정착하니까 그냥 정착한 거예요.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명하셔서 가서 정착한 곳이 가나안 땅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쉽죠. 하지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셨지, 그 땅이 어딘지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목적지가 가나안인지 알지 못하고 갑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인지, 얼마나 걸리는지, 그 길이 얼마나 험한지, 누가, 그리고 어떤 상황이 기다리는지 알지 못하고 갑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의 걸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큰 결단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다들 비슷한 결단을 하셨잖아요. 물론 아예 모르고 떠난 것은 아니지만, 목적지가 정해져 있긴 하였지만, 그럼에도 고향 땅 한국을 떠나 이 땅 뉴질랜드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데에 있어서는 엄청난 결단이 있으셨죠.  그럼 이러한 우리의 결단을 아름답게 만들어가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할까요? 하나님의 뜻을 향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은 일평생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결단으로 살아갔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도 결단이었고,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도 엄청난 결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뜻을 붙잡고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붙잡고 매 순간 믿음으로 결단하며 나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완전한 순종입니다. 


창세기 12장 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여기까지 이를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요? 아브라함이 마침내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땅에 이르는 결단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완전한 순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두려움은 반비례 관계라고 말씀드렸죠. 믿음이 강해지면 두려움은 사라집니다. 반대로 두려움이 커지면 믿음은 점점 작아집니다. 그럼 믿음과 순종은 어떨까요? 믿음과 순종은 완전한 정비례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대표적인 순종의 모습 중에 하나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향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바와 같이 “큰 민족을 이루고, 복을 받고, 이름이 창대해지고, 그 땅을 다 차지하고...” 그래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된 약속의 성취는 고사하고, 당장 거할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계속 이리 저리 떠돌아다닙니다. 외지에서 온 사람을 쉽게 받아주지 않으니까 그런 거죠. 텃세에 밀린 겁니다. 그럼에도 아브라함이 잘 한 게 있죠. 언제나 가는 곳마다 정착하는 곳마다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합니다. 그 결과 13장 2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나오는데 “가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 뿐입니다. 그 순종함의 증거로 하나님께 매 순간마다 예배한 것 뿐입니다. 그랬더니 결국 상황이나 모든 여건에 있어서는 줄어들어야 하는데, 도리어 날마다 번창하게 하시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또 하나 말씀에 순종하는 대표적인 모습은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백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하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바치라 하셨기에 바친 겁니다. “하나님께서 설마 죽이시겠어?” 이런 차원이 아닙니다. 바치라 하셨기에 바친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살려주셨죠. 아브라함은 이삭의 생명까지 바쳤는데,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해 이미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것과 같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은혜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완전한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순종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따르는 것입니다. 순종이라고 하면 늘 떠오르는 말씀 중에 하나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라는 사무엘의 사울왕을 향한 책망의 말씀입니다. 왜 사울은 그대로 순종하지 못했을까요? 간단합니다. 잘 듣지 않았기에 그대로 순종하지 못한 겁니다. 잘 들어야 잘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에, 선포되는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안에 담겨진 나를 향한 음성을 잘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생각 집어 넣지 말고, 필터 없이 잘 듣고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한 순종으로 믿음의 길을 걷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을 받아 누리는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의 약속은 어떤가요? 하나님편에서 아브라함에게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만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명하시는 것들이 있었거든요. 단순히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을 받는 것” 그건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받은 축복의 말씀을 누리는 것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에 합당한 믿음, 자세, 삶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크게 두 번의 결단이 있다고 말씀드렸죠. 먼저 창세기 12장에,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  또 하나, 창세기 22장에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명하셨습니다. “떠나라!” “바쳐라!” 그 말씀에 순종할 때에, 그의 삶과 후손들을 통해 성취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은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제 결단과 순종하는 삶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까닭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더 성장하고 성숙하여 더 귀한 믿음의 인물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신명기에 계속 반복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을 것이다.” 저들이 이미 출애굽해서 광야에 나온 것 자체가 축복입니다. 이것만 해도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머물지 않고, 더 성장하고 성숙하여 하나님 예비하신 더 큰 상급도 누리길 원하시는 거예요. 

 

우리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믿음의 자녀된 우리들이 구원받은 은혜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더 성장하길 원하십니다. 더 하나님 뜻대로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 “이렇게 순종하면, 이렇게 사명 감당하면 이런 상급도 주실 거야.” 그러면서 축복의 약속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고 성숙하다보면, 어떻게 되나요? 더 나아가 “하나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시련과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를 향한 사랑은 변함이 없을 것입니다.” 내 믿음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혹 아직 내 신앙이 어린아이처럼 연약하면 “축복을 받기 위해서라도” 한 번 순종해 보십시오.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하고 봉사해 보십시오. 그러는 중에 어느 순간 성장하고 성숙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축복된 약속을 받을 뿐만 아니라, 내 것으로 누릴만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믿음의 첫발을 내디딘 아브라함과 같이, 나도 우리 가정 안에서, 가문 안에서, 또한 내 개인의 신앙의 자리에서 믿음의 첫발을 힘있게 내디뎌 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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