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07) 영적인 변화, 삶의 축복 <스바냐 3:14~20>
2025년 한 해의 삶,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러한 영적인 변화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영적인 변화, 삶의 축복을 이루어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약속의 자녀 이삭을 얻기까지 25년의 시간을 지내야 했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한 아브라함에게 즉각적인 축복이 임하였으면 좋으련만,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수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변화를 위한 시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이러한 영적인 변화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주신 선물과도 같은 시간, 금년 한 해의 삶을 이러한 하나님의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영적인 변화의 시간으로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예배를 사모하고, 더 힘을 다해 기도하고, 더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더 헌신된 삶을 살아가는 영적인 변화를 이루어갈 때에, 하나님 예비하신 삶의 축복이 우리에게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럼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영적인 변화는 무엇이고, 또한 예비된 축복은 무엇인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완전한 회복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갈 인물을 세워주십니다. 시대가 악해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무너지는 것 같은 현실 속에도, 언제나 남은 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정말 믿음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모두에게도 남은 자로서의 사명, 은혜, 특권이 주어져있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영적인 변화를 이루어가기에 합당한 신앙의 정체성입니다.
이어지는 본문 1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가 네 형벌을 제거하였고 네 원수를 쫓아냈으며...” 이게 어떤 의미인가요? 스바냐서의 앞부분에 선포되었던 모든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이 다 끝이 났다는 것입니다. 벌 받는 게 끝나면, 그 다음은 회복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완전한 회복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의 가장 큰 목적이 무엇인가요? 한국기독교목회자 협의회에서 “당신은 왜 교회에 다닙니까?”라는 제목의 설문 조사를 한적이 있습니다. 가장 많은 답이 뭔지 아십니까? “구원과 영생을 위하여.” 무려 42.5퍼센트입니다. 참 감사한 것이 신앙생활하는 성도들의 기본적인 생각 자체가 제일 먼저는 “구원과 영생”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곧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구원과 영생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가요? 한마디로 완전한 회복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사,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 당하신 것, 이를 가르켜 “십자가 구원의 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갈 길이 죄로 인해 막혀졌는데,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길이 다시금 열려졌습니다. 끊어진 길이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회복이죠.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도 이러한 완전한 회복의 은혜가 이미 임하였음을 꼭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를 받은 자로서 우리의 삶은 날마다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가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요, 영적인 변화요, 이를 통해 천국의 기쁨이 임할 뿐만 아니라, 내 삶의 축복도 실현되는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완전한 회복의 역사와 더불어 영적인, 삶적인 축복까지도 풍성히 누리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 본문 17절 말씀의 주인공은 ‘나’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해,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해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 “나는 너로 말미암아 기뻐한다.” “나는 너를 잠잠히 사랑한다.” “나는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고 기뻐할 것이다.” 이 한절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다섯 번에 걸쳐서 반복적으로 선포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실 교회에서 늘 들어온 말씀입니다.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 그런데 이 말에는 뭔가 부족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은 하나님의 나를 향하신 사랑은 체험적인 고백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이게 노력을 한다고 되나요? 그렇지 않죠. 사랑이나 믿음이나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거예요. 어느 순간 내 마음에 확 들어오는 겁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때로 이 보여지지 않는 것을 보는 것에서 찾으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의 사랑도 나의 현실의 삶을 바라보며 평가하곤 합니다. 체험적인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사람들간의 사랑에 있어서도, 정말 사랑한다고 하면, 존재 자체로 인해 기뻐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마음만 느껴지면 무얼 해도 다 좋은 거예요. 그게 곧 체험적인 사랑의 증거죠. 그래서 하박국선지가 고백하잖아요. “하나님! 나는 아무 것도 없어도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고 즐거워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어린 아들이, 딸이, 손주가 유모차에 앉아서 한번 씽긋 웃어주면, 부모님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죠. 그 시선으로, 그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 사랑의 시선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곧 체험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흔들릴 때가 있거든, 의심이 될 때가 있거든,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사, 구원하시려고, 죽임 당하신 십자가의 사건은 이천년전부터 지금까지, 또한 앞으로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 하나면 충분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안에 거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축복의 증거자가 되게 하십니다.
유다 백성들의 죄악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유다를 징계하시고, 저들은 포로로 끌려갑니다. 저들의 지금 처지는 “괴로움을 당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들을 회복시키시사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심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면서 수없이 답답해 합니다.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이라고 하는 자들이 저렇게 우상을 숭배하고,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살아가는가?”
그럼 과연 우리는 얼마나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서 흔들림 없이 살아가고 있는지요? 이렇게 보면, 바른 믿음의 길을 끝까지 잘 걸어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더라구요. 언제나 말씀과 기도 위에 굳건히 서길 원하지만, 갈대와 같이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끈을 놓지 않는 거예요. 연약해도 부족해도 실족했어도, 돌이켜 주님을 향해 손을 뻗을 때에, 하나님께서 붙잡아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은 치욕의 날일지라도 주를 바라보는 자, 칭찬과 명성을 얻게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성도님들을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는 자의 삶에 임하는 축복이 어떠한지를 증거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그 영적인 변화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나요?
18절에 말씀합니다. “내가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을 모으신다고 말씀하나요?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으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사야 61장 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절기로 말미암아 근심하는 자”,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 다 같은 의미입니다. 예배할 수 없음에 슬퍼 우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모으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변화, 그 출발은 예배를 사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2025년, 한 해의 삶을 영적인 변화의 시간으로 만들어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의 삶을 바꿔가는 일입니다. 더 예배를 사모하고, 더 힘을 다해 기도하고, 더 전심으로 주님을 찬양하고, 더 헌신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영적인 변화를 이루어갈 뿐만 아니라, 하나님 예비하신 삶의 축복도 풍성하게 누려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