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54)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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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광림교회 주일설교 (354)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 <빌립보서 2:12~21>

일요시사 0 22 0 0

할렐루야!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말씀의 은혜와 성령의 충만함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 함께 나눌 말씀의 제목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우리가 빌립보서의 말씀을 읽었는데,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구절 중에 하나가 빌립보서 4장 4절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는 옥중서신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혀 기록한 서신입니다. 그런데 감옥에 갇혀 기뻐할 것이 무엇입니까? 게다가 내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일, 복음의 사명 감당하다가 옥에 갇혔으니, 바울에게 원망이 가득해야 할 터인데, 도리어 기뻐합니다. 성도들에게도 권고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떻게 기뻐할 수 있나요? 지난 주일에 말씀드렸죠. ‘그리스도인의 지혜로운 삶’ 그 마지막 세 번째가 “초월적인 기쁨을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초월적인 기쁨, 빌립보서에서 바울이 누리는 기쁨이 바로 이런 초월적인 기쁨입니다.  


우리가 지금 지내고 있는 대림절은 기다림의 절기입니다. 어떤 기다림인가요? 두 가지 기다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천여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의 기다림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향한 기다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오신 예수님과 오실 예수님, 그 사이의 시간을 걷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의미 있는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만들어가야 할 터인데,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식하고, 또한 의지함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살아가는 자,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고백하고 인정하고 의지함으로 살아가는 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함께 말씀을 통해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이름을 떠올리면 연상되는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을 기록한 바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무엇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복음 전도자”입니다. 바울이 3차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앞을 막아섭니다. “바울 선생님!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반드시 붙잡힐 것입니다.” 사실 바울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붙잡힐줄 알고도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그 결과 유대 왕 아그립바에게, 로마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에게도 복음을 전합니다. 로마에 이른 바울은 투옥중에도, 여기서 투옥은 가택연금입니다. 그 속에서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사도행전 28장의 마지막 30절과 31절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의 이러한 행적을 보면, 죄수로서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심문을 당하는 중에도 유대 왕에게, 로마총독에게, 대제사장과 유대인들에게,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의아해합니다. “저 바울이 믿는 예수가 누구이기에 저렇게 당당하단 말인가?”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지금 옥에 갇히게 된 것, 그 이전에 예루살렘에서 잡힌 것, 심문을 당한 것, 압송되어가는 과정, 그 모든 것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13절과 14절에 이어서 말씀합니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죄수 신분임에도 당당한 바울의 모습이 저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겁니다. 그래서 “저 바울이 믿는 예수가 누구인지, 이야기나 들어보자.” 이렇게 해서 믿는 자가 더해집니다. 또 하나는 바울의 담대한 복음 전파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다른 전도자들도 용기를 얻고 더 힘있게 복음을 전합니다. 이러한 바울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떤가요? 누구나 다 바울이 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복음 증거자의 본이 되었지만, 또 누구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정말 두렵고 힘든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일에, 자신이 받은 은사에 합당하게 행하여 그 분야에서 본이 되면 됩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어디에서 어떤 역할을 하든지 본이 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내 힘만 가지고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식함으로 감당해야 합니다. 더불어 이거 하나를 더하면 좋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 말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내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갈 때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주를 대하듯이 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믿는 사람들에게나, 믿지 않는 자들에게나 본이 되는 모습을 갖춰가게 됩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언제나 어디에서나 본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번째로, 함께 누리는 기쁨이 있습니다. 


서론에서도 언급했듯이, 지난 주 설교의 세 번째 대지가 “초월적인 기쁨”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초월적인 기쁨은 개인적인 측면입니다. 나에게 주를 향한 믿음이 있기에, 상황과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을 누리는 것, 그게 바로 초월적인 기쁨이라고 말씀드렸죠. 오늘은 공동체적인 기쁨에 대해 좀 더 강조하고자 합니다. 본문에도 보면 12절에 “형제들아!” 이런 말씀으로 시작하죠. 그러면서 바울은 14절부터 자신의 투옥과 관련된 복음 전파의 상황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4절에 보면 바울의 매임과 함께 앞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매임과 그 속에서도 당당함을 바라보면서 나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그런데 15절에 보면, 복음을 전하는 이들이 두 부류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어떤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의 마음으로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전합니다. 이게 어떤 의미인가요? 지금 바울이 옥에 갇혔습니다. 그속에서도 복음을 전하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자유롭지가 않죠.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때라 이때라! 바울 이겨 먹을 때가 이때라.” 그 마음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더 확장시키려고, 바울보다 더 많은 제자를 삼겠다는 투기와 경쟁의 마음으로 복음 전파에 열심을 내는 거예요.


바울은 이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1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저들이 나를 이겨먹겠다고 복음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니,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말씀합니다. 함께 누리는 기쁨입니다. 우리가 때로 교회에서 함께 예배하고, 함께 봉사하고, 함께 복음을 전하고, 그러면서도 함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습니다. 저 사람과 비교하고, 이 사람과 비교하고, 신앙의 열매들을 자꾸만 비교하면서 자고하거나 낙심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비교의 2행시가 있습니다. “비-비참하거나, 교-교만하거나.” 비교하면 남는 것은 결국 이 둘 중에 하나 뿐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함께 잘 되길 바라고, 함께 기뻐하고,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그렇기에 오늘 바울은 어떻게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선언합니다. 투기와 욕심으로, 나를 이겨먹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자와도 함께 기뻐하겠다는 의지입니다. 우리 뉴질랜드광림교회 공동체 안에 함께 누리는 기쁨이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간다면, 주의 뜻을 따라 함께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기뻐하는 자의 삶에 하나님께서 함께 잘 되게 하시는 은혜도 부어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 가지고, 모든 믿음의 동역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리 가족들과도 함께 기뻐하고, 세상 속 삶의 자리에서 마주하는 모든 이들과도 함께 기뻐하고, 무엇보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참 기쁨을 누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끝으로,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증거합니다. 


본문 마지막 20절과 21절에 바울은 고백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힌 상태로 로마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 현실 속에서 말하는 겁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지, 그 결과에 따라서 내가 살게 되든지, 아니면 사형판결을 당하여 죽게 되든지, 어떤 상황이 닥쳐올지라도, 나는 이전의 모습 그대로 오직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위해 힘을 다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선포합니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말씀은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겠다.” 또는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죽을 수도 있다.” 이런 고백이 아닙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내 삶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완전한 연합입니다. 그리고 그 삶을 통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 즉 나의 모든 삶, 또한 내 죽음까지도 다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증거하는데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이러한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기를 원합니다. 우리 20절과 21절의 말씀을 결단의 고백으로 함께 읽어볼까요?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는 바울의 생명을 건 결단과 고백입니다. 동시에 바울의 벅찬 감격과 영적 기쁨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저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함으로, 담대하게 결단하고 고백하며 살아갈 뿐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줄 믿습니다. 이러한 믿음 가지고,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한 연합을 이루어, 본이 되는 삶, 함께 기쁨을 누리는 삶, 이 모든 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존귀함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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