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큰아들의 신앙과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
산들바람
지난 글 '기다리시는 아버지' (7/23) 에 이어 주님께서 들려주신 탕자의 비유, 즉 집 떠난 둘째 아들을 간절히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함께 나누며 ‘오늘의 우리 한국 교회, 이대로 좋은지’ 돌아보고자 합니다.
1. 큰아들과 한국교회
그러면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교우님들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며, 다음으로는 세상을 밝고 아름답게 하는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목사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서약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하나님 섬기듯 교우님들을 섬기고 세상의 평화를 위해 일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교우님을 섬기기보다 스스로 군림하여 교우님들께 맹목적 순종을 강요하는 목사들이 있으며, 심지어 교회를 사유재산처럼 생각하여 자식에게 세습하는 일부 대형교회 목사도 있습니다.
교회의 내실을 다지기보다 건물짓기 경쟁으로 교우님들께 과도한 재정적 부담을 지우고, 세상에 평화를 심기는커녕 갈등과 분란을 일으키는 교회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물론 한국 교회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교우님 섬기기를 주님 섬기듯 하며, 세상에 평화를 심기 위해 온갖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 진실한 목사님들도 많이 계십니다. 그 분들에게는 진실로 머리 숙여 존경심을 표하고 싶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께서 들려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둘째 아들을 받아주는 대가로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 있었던가요?
탕진했던 돈을 되찾아 오라고 하셨던가요?
냄새나는 옷을 벗어버리고 깨끗이 목욕하고 몸단장한 다음에 오라고 하셨던가요?
아버지는 아무 조건 없이 둘째 아들을 맞아주셨습니다.
그러나 교리적 시각에 사로잡힌 설교자들은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바로 그것 때문에 아버지께서 용서하신 것이다. 집을 떠난 탕자는 비참한 거지신세였고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 아버지께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한, 탕자는 결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비로소 용서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용서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이 없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나 집을 떠난 후에나 아버지의 사랑은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달라진 상황은 단지 아들이 선택한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나 방탕한 삶을 산 것도, 그래서 괴롭고 외로웠던 것도 모두 아들의 선택에 따른 결과였습니다. 만약 아들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독립하여 살아가면서 아버지와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그것 또한 해피엔딩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집을 나갔다, 또는 집으로 돌아왔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마음이 떠났다가 돌아왔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비유에서 심각하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버지와 집을 늘 동일선상에 놓고 본문을 해석하는 데 있습니다. 집을 떠난 것은 곧 아버지를 떠난 것이고, 집으로 돌아와야만 아버지께로 돌아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가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치명적인 결함이고 병입니다.
교리주의자들에게 본문에서의 집은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이고 교회로 돌아와야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라고 그들은 해석합니다.
이런 해석의 결과로 60년 전까지도 천주교는 “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지금 천주교는 개신교를 형제로 포용하고 있지만 목사들 중에는 여전히 가톨릭은 사탄이며 그곳엔 구원이 없다고 가르치는 분들이 있습니다. 형제를 정죄하는 모습을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내려다보고 계실까요?
2. 하나님의 은총은 천하 만물에 차별 없이 적용됩니다.
저는, 오늘날 하나님의 은총은 차별 없이 만민에게 적용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만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선하고 바르게 살아가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독선과 배타야말로 큰아들의 심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여전히 큰아들의 신앙, 큰아들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으로 너무 쉽게 이웃을 판단하고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는지요?
자기와 같은 방식, 자기와 같은 신앙, 자기와 같은 종교가 아니면 다 잘못된 것이며, 지옥불에 떨어질 불쌍한 인생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인이 아직도 우리 한국 교회에는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혹 문제가 있더라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셨습니다. 아니, 예외가 있기는 있었습니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어서는 안된다고, 특정 종교조직 안에 들어와서 수련을 쌓아야만, 종교의식과 의무를 다해야만 하나님의 은총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존중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리를 배우기 전에, 우리 예수님처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독점하려는 무모한 욕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 기독교는 끊임없이 우리 사회와 지구마을에 갈등을 양산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구원을 받아야할 대상은 교회 밖에 있는 분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한국 교회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기독교 뿐 아니라 역사상 지구마을에 꽃핀 수많은 아름다운 종교들, 아름다운 문화들을 통해서도 당신을 충분히 나타내셨고, 그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아가고자 애쓰는 모든 지구마을 이웃들에게 아무 차별 없이, 아무 전제도 없이,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으나 큰아들의 가출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집안에 있지만 아버지를 떠난 큰아들은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될까요?
교회 안에 있지만 하나님을 떠난 교회지도자들과, 그들의 가르침에 세뇌되어 배타 교리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과 혼동하는 가엾고 순진한 한국 교회의 많은 교우님들은 언제나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