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거시기 아내와 살고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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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거시기 아내와 살고있소

아고라 0 1859

신혼 초에 땅 끝 해남 처가에 갔을 적 일이다.

저녁 밥상을 물리고 주안상을 차려오신 장모님이 잠깐 자리를 비운사이

장인어른과 삭힌 홍어회에 한 순배 도는데 부엌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설거지를 하던 아내가 사기그릇을 깬 모양이다. 멋쩍은 듯 깨진 그릇을 들고

고개를 내밀며 씨익 웃는 아내. 장인어른의 한숨 소리가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쟈가 말여. 자네 장모를 쏘옥 빼 닮아서 거시기 헝께, 살면서 거시기 같더라도

잘 다독이며 살게나”

무슨 언질이신지 도저히 해석 불가한 말씀이지만 어쩌랴. 머리 조아리고

명심 하겠습니다 할 수밖에.

“아부지. 엄니 어디 가셨어라?” 고향에만 내려오면 자기도 모르게 사투리를 하게

된다는 아내.

“몰것다. 느그 엄니 원체 거시기혀서 이 저녁에 밭에 갔을끼구마”

“아이고 엄니넌! 시방도 옛날 맨치로 거시기 해 부러요? 참말로. 훤한 대낮에 헐 일이제”

설거지를 끝내고 안방에 철퍼덕 앉은 아내와 장인의 대화는 알듯 모를 듯 오묘함을 더해갔다.

“느그 엄니 거시기 헝거 인자 알았는감? 금방 올 것이여” 장인어른의 예언?이 있은 직후

바로 툇마루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장모님이 오신 것이다.

사십 키로 두 포대에 고추를 따 담아 당신 혼자 이고 오셔서 마루에 던져 놓은 것이다.

“고새 밭에 가서 고추 따셨소? 엄니, 참 징허요. 내일 이 서방하고 딸 낀데…….”

옷에 붙은 흙을 툭툭 털이시는, 한 덩치하시는 장모님이 마루에 풀썩 앉자 쿵소리가 들려왔다.

“놀면 뭐할 것이여, 낮엔 허벌나게 더워븡께 밤에 허는 것이제”

“장모님. 저녁에는 길도 어두워 넘어질 수도 있고 위험하니까 낮에 쉬엄쉬엄 하세요”

“옳여. 이 서방 말이 공자님 말씸이시. 자네 들었는감?”

마당 한 구석에 웅크리고 엎드려 있던 백구 녀석이 긴 하품을 해댄다.

18년의 세월이 흘렀다. 며칠째 장맛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저녁.

퇴근했을 아내가 집에 올 시간이 지났는데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요즘 들어 회사가 바쁘다며 시시때때 연장근무를 하던 아내였기에 오늘도 아내는

회사에서 바쁜 손놀림을 하는 모양이다.

아내가 오면 함께 먹으려 했던 저녁 밥상을 어머니와 둘이 비워 가는데 비를 쫄딱 맞은

고등학생 아들 녀석이 투덜거리며 들어왔다.

“에고 징그러운 비! 잉? 엄마 안 오셨어요?” 젖은 교복을 벗어 휙 집어 던지고는 속옷 바람으로

식탁에 앉는 녀석

“회사가 바쁜가봐. 어여 밥이나 먹어” 고봉의 밥을 먹으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녀석이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아까 학원가다가 엄마 만났는데 …….” 말끝의 여운은 늘 궁금함을 불러온다.

“어디서? 엄마 회사에 있을 시간인데?” 잘못 보았겠지 하고 넘어가려는데

“저기 병원 앞에서. 감기몸살 때문에 주사 맞고 나오는 길이라고. 할머니하고 아빠한텐 비밀로 해달라고.”

비밀로 부치기엔 녀석도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을까. 밥숟가락을 슬그머니 내려놓는 녀석.

“아이고. 미련하기는 쯧쯧” 어머니도 손자의 말에 입맛을 잃으셨는지 수저를 내려 놓으셨다.

아내는 병원에 다녀온 후 집에 오지 않고 다시 회사 일터로 가 연장근무를 했던 것이었다.

방안으로 들어와 아내에게 급히 전화를 걸었다.

‘내가 돈을 못 벌어 오냐? 살면 얼마나 산다고 그렇게 곰처럼 일하느냐. 아프면 아프다고

칭얼거리고 엄살도 좀 부리지. 아양을 떨 줄 아나. 그렇다고 여우 짓을 부릴 줄 아나. 이 곰 같은 여자야.’

라고 야단을 치려는데 “휴대폰이 꺼져있어 소리샘으로…….” 휴대폰 속 미스 김의 만류에 긴 한숨으로

대신했다.

비에 젖은 바지 밑단을 걷어 올린, 여자 천하장사 같은 몸집의 아내가 들어온다.

아까 전화상으로 하지 못했던 그 말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려는 순간, 후줄근한 18년 지기 아내의 모습을

보노라니 사그라지는 촛불처럼 약해지는 마음.

모르는 척 “밥은 먹었어? 회사 바쁜가봐. 아무리 바빠도 쉬면서해. 그러다 병나면 당신만 손해고

또 속상하니까” 아무 일 없던 듯 알았다며 방에 들어가는 아내.

샤워를 마친 아내가 잠자리에 드는 모습이 보였다. 야간 근무를 나서기 전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아내가 방금 나온 샤워부스 안 배수구에 떨어져 쓸려있는 긴 머리카락. 아내도 늙어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영원한 헤어짐이 올 터인데 살기위한 몸부림의 흔적은 왜 이리 가혹하기만 한 것일까.

떨어진 머리카락 한 움큼을 쓸어 담아 버리고 나오니 그사이 잠이 든 아내. 침대엔 곰 인형이 약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방문을 소리 없이 열고나와 야간 출근 하는 길.

신혼 초에 장인어른이 내게 “갸가 거시기 헝께, 거시기 같더라도 잘사시게” 하셨던 말씀의 원뜻을

이제야 알듯하다. 아마도 그 말씀은 거시기 같은 마누라 옆에서 변치 말고 평생 머시기로 잘 살라는

뜻이 아니었을까.

출처 : 역마차 - 아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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