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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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사랑

추억의 그 음악 0 1293
한국 발라드 계보'의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순간

1990년대에 한해서라면 적어도 '대중적 인기'라는 측면에서 신승훈을 따라올 자는 거의 없었다. 서태지나 김건모, 또는 신해철만큼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는 못했지만, 대신 그는 '음반 시장의 환호'로 그것을 보상받았다. 신승훈의 증언에 따르면 이 앨범만 거의 140만 장이 나갔고, 6집에서 이미 1000만 장 고지를 돌파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차후의 인기 곡선을 수직 상승시켜준 결정적 발판이 바로 본 2집이었던 것이다. 신승훈 자신도 "이 앨범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다"라고 동의한다. 그것은 가히, 가공할 만한 히트 퍼레이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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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명 :2집 보이지 않는 사랑

데뷔작 [미소 속에 비친 그대]로 음악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이 싱어-송라이터는 본 2집을 통해 '신승훈표 발라드'라는 자신만의 음악 공식을 만들어내며 단숨에 수면 위의 부표로 떠올랐다. 특히 자동 소멸 제도가 없었던 당시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타이틀 곡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10주가량 1위를 차지, '하우스홀드 네임'급으로 자리 잡은 것이 결정적이었다. 1992년 초반 당시, 팝 쪽에서는 휘트니 휴스턴(Whitney Houston)의 'I Will Always Love You'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다면, 가요 쪽에서는 단연 '보이지 않는 사랑'이 대세였다. 이 곡 외에 '날 울리지마', '우연히', '가을빛 추억' 등의 후속곡들도 쉴 새 없이 방송 전파를 유린하며 1992년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의 음악에는 확실히 일체의 공격성이라고는 없었다. 발라드는 물론이요, 가벼운 비트의 댄스곡을 부를 때에도 그가 기대고 있는 토양은 명백히 다수 대중의 '안정희구 심리'였다. 바로 그가 10대를 뛰어넘어 전 세대와 공감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동인이다. 여러모로 그는 '젊은 세대의 역습'을 담보한 서태지와 참 달랐다.


프로듀서 김창환과의 콤비 플레이가 절정의 기량을 뽐냈던 이 음반의 결과는 기실 그 자체로 예약된 성공을 의미했다. 김광석, 손진태, 배수연, 함춘호, 신대철, 이정식 등 화려한 세션의 면면들이 우선적으로 말해준다. 이 '드림 팀'이 연출한 발군의 연주를 등에 업고 신승훈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보컬 기교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음색과 다채로운 표현력 등, 완벽에 가까운 그의 노래 실력에 많은 팬들이 감탄을 보냈다. 이문세, 김민우, 변진섭의 뒤를 잇는, '한국 발라드 계보'의 새로운 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한 가지 다른 부분이 있다면, 신승훈은 곡을 받아서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쓰고 불렀던 '싱어-송라이터'였다는 점. 신승훈이 가요 프로에서 1위를 차지한 곡 모두가 다름 아닌 그가 직접 만들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자신의 음악적인 멘토로 다름 아닌 고(故) '유재하'를 꼽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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