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진 IT거성 스티브 잡스 애플 전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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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진 IT거성 스티브 잡스 애플 전 CEO

철암 3 1225
떨어진 IT거성 스티브 잡스 애플 전 CEO
글로벌 IT업계 큰 별, 전설 속으로 사라지다

 글로벌 IT업계의 큰 별, 스티브 잡스가 세상을 등졌다. 애플 CEO에서 물러난 지 불과 40여일 만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세계는 비통에 잠겼다. 각계각층의 조문행렬이 줄을 이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면서도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면서(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치열한 삶을 살다 떠난 잡스. 그가 걸어온 굴곡진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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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동거 커플 사이에서 태어나 1주일 만에 입양
비행청소년→대학 중퇴→애플 창업→IT업계 큰 별


스티브 잡스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원생 동거 커플인 미국인 어머니와 시리아계의 아버지 압둘파타 존 잔달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1주일 후 학교를 다니고 있던 그의 어머니에 의해 캘리포니아 주 산타클라라의 잡스 부부에게 입양됐다.

잡스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를 자주 빼 먹는 비행청소년이었다. 담임선생님이 돈과 사탕으로 구슬려 겨우 학교생활을 했다. 그런 잡스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건 히스키트라는 아마추어 전자공학 키트를 얻은 순간이었다. 이 덕분에 잡스는 어려서부터 전자제품의 작동원리를 익히게 됐다.

대학교 중퇴 후
18개월 간 청강

1972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잡스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위치한 리드대학교에 진학해 철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1학기만 수강한 후 중퇴했다. 부모님들이 비싼 학비를 내주는 게 부담스러워서였다. 하지만 중퇴 후에도 잡스는 18개월 동안 학교에 머물면서 여러 강좌를 들었다. 특히 글자를 다루는 시각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수업은 이후 그래픽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발하면서 수려한 글자체를 만들어 내는 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한다.

대학을 중퇴한 직후에는 컴퓨터게임회사인 아타리에 취직했지만, 사실상 전자공학이나 컴퓨터에 대한 그의 지식은 그리 대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탁월한 직관을 지닌 몽상가였고, ‘잔머리 굴리기’에 능숙한 수완가였으며, 이런 성격은 훗날 그의 성공과 실패 모두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잡스는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동업해 애플 컴퓨터를 설립했다. 여기서 최초의 개인용 컴퓨터 애플1을 공개했다. 애플1은 모니터도 없고 디자인도 투박했으나 의외로 큰 반응을 보이며 판매에 성공했다.

이어 출시한 ‘애플2’는 그 이전까지만 해도 일종의 비싼 장난감 정도로만 여겨지던 PC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며 ‘애플신화’를 일궈냈다. 창립 4년 뒤인 1980년, 잡스는 PC 100만대 판매라는 위업을 달성하며 단숨에 거부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1981년에 IBM 사에서 ‘PC(Personal Computer)’ 시리즈를 발표하면서 애플2의 독주가 위협받기 시작했다. IBM PC 시리즈의 최대 특징은 바로 완전한 공개형 아키텍처(Architecture: 시스템 전반의 구조 및 설계방식)를 내세웠다는 점이다. 때문에 IBM 외의 제조사에서도 이와 완전히 호환되는 PC 본체 및 주변기기, 소프트웨어를 자유롭게 설계, 생산할 수 있었다. 애플2도 호환 기종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애플에서 저작권을 상당히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애플2 호환 기종의 대부분은 비공식적인 것이었다. 때문에 이런 애플2의 호환 기종들은 법적, 성능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1982년 새해에 잡스는 20대의 거부로 <타임>지 표지에 등장하며 명성이 절정에 달했지만, ‘사과’는 속부터 곪아가고 있었다. 물론 애플의 핵심은 잡스와 워즈였지만, 회사의 성장을 위해서는 외부 자본과 인력이 필요했으며 그로 인해 여러 가지 갈등도 불가피했다. 잡스의 성공 요인이었던 특유의 오만과 고집은 이제 내실을 기해야 하는 애플에는 오히려 부담이 됐다.

애플2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회사의 매출은 점차 떨어졌다. 야심작 매킨토시를 내놓았지만, 당시에는 구매자의 요구를 파악하기보다는 그저 외양에만 치중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결국 1983년에 애플은 PC 시장에서 IBM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그 와중에 권력다툼으로 인해 축출 위기를 맞은 잡스는 1985년에 이르러 애플을 떠난다. 잡스는 넥스트(NeXT)라는 회사를 설립해 새로운 PC를 내놓지만, 개인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사업은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다. 바로 그때, 오래 전부터 잡스의 소유였지만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했던 컴퓨터 그래픽 업체 픽사(Pixar)가 디즈니와 제휴해 만든 <토이 스토리>가 대박을 터트린다. 연이은 픽사 제작 애니메이션의 히트 행진에 잡스는 드디어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잡스 떠난 애플
급격한 내리막길

반면 잡스가 떠난 애플은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급기야 1997년 적자가 18억달러에 달할 정도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결국 애플 이사회는 잡스에게 손을 내밀고, 잡스는 1997년 ‘임시 CEO’로 애플에 복귀했다.

굴욕의 퇴진을 당한 지 13년 만에 ‘왕의 귀환’을 이룬 잡스는 이듬해인 1998년 내놓은 아이맥이 히트를 치면서 적자에 시달리던 회사를 흑자로 돌려세웠다. 그리고 2000년 1월부터 잡스는 정식 CEO가 됐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애플의 전성기가 시작됐다. 2001년 아이팟 출시가 시작이었다. 아이팟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사람들이 음악을 즐기는 방식을 완전히 바꿔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이팟은 세계적인 열풍과 함께 잡스를 다시 한 번 ‘성공 신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줬다. 이와 같은 잡스의 업적과 영향력 때문에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나오기도 했다. 일부 팬들은 잡스를 예수에 빗대어 추켜세우기도 했다.

1985년 내부 권력다툼으로 축출…다른 회사 창업
13년 만에 복귀해 전성기 이끌다 건강에 이상신호

성공에 취해 있을 당시 잡스에게 예기치 않은 비보가 날아들었다. 2003년 췌장암 선고를 받은 것. 다음해인 2004년에는 췌장암 수술도 받았다. 그러나 그의 건강은 회복되지 않았고 계속 악화된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가운데 애플 측은 주가하락 등을 이유로 건강 이상설을 부인해왔다.

다행히 잡스는 2005년 췌장암을 극복했음을 알리며 화려하게 부활했고, 2007년에는 아이폰을 내놓으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잡스는 2008년 6월 아이폰3G 공개 행사 당시 수척해진 외모 때문에 와병설이 나돌기 시작했고, 그해 10월에는 애플 연례행사에 불참하면서 이 같은 의혹에 불을 지폈다.

아니나 다를까 잡스는 2009년 6월 간 이식 수술을 위해 두 번째 병가를 냈다. 호르몬 이상으로 체중 또한 지속적으로 줄어 2009년부터 호르몬 치료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건강 이상설에 따라서 주가가 무려 6%나 등락했다.

그해 9월 잡스는 성공적으로 수술을 마치고 돌아오며 또다시 부활을 알렸다. 곧바로 아이패드를 선보이며 화려하게 컴백했다. 2010년 4월 발매한 아이패드는 연말까지 1000만대 이상 팔렸고, 아이폰4 역시 공급부족에 허덕일 정도로 높은 인기를 끌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다.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

하지만 2011년 1월 잡스는 건강이 다시 악화돼 병가를 냈다. 이에 따라 애플의 주가는 6.5% 급락했다. 건강에 대한 우려가 나오던 가운데 잡스는 백악관에서 만찬을 가졌고 사진도 공개되면서 화제를 모았다. 이후 파파라치가 찍은 잡스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이전보다 훨씬 수척해진 모습이어서 췌장암 악화로 인한 6주 시한부설이 사실이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2011년 3월, 아이패드2를 발표하기 위해서 잡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잡스는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는 건강한 모습을 보여 경영에 문제가 없음을 입증했다. 하지만 잡스가 연단에 선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잡스는 다시 병세가 급속히 악화되면서 지난 8월24일 CEO 자리를 후계자 팀 쿡에게 넘기며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불과 40여일 뒤인 지난 5일 영면에 들었다.

잡스는 성공과 좌절이 교차하는 ‘롤로코스터’와 같은 인생을 살면서도 스탠퍼드대 연설 말미에 밝혔듯이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전진하면서(Stay Hungry. Stay Foolish)” 항상 자신의 신념에 따라 치열한 삶을 살다 떠났다. 이 같은 삶 자체야말로 스티브 잡스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선물이 아닐까.

3 Comments
이마음 2011.10.25 00:37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인물중에 한분이었는데, 사망소식에 너무 슬펐습니다.

15년전 나는 영어책을 출판하는 회사에서 근무한적이 있습니다. 포토샵을 다룰수 있었지만 애플 컴퓨터의

편집툴은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회사 사장님이 다른툴을 잘 하니까 책 편집도 잘 할거라고 권했습니다. 

물론 ok했지만 처음 접하는 애플은 낮설었는지... 쉽게 되지 않더라구요. 한 1주일정도(주로 밤을 샘) 해보니까 그때는 오히려 기능적으로 훨씬 좋았습니다. “아 이것이 바로 애플이군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스티브잡스분을 알고 있었습니다...

난 그때 조금 투정도 부렸습니다. PC과 호환이 안되는겁니다. “왜 이렇게 호환이 안되게 만들었지”하고 짜증도 냈구요.

오랜기간 애플를 사용했지만 대단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어느덧 15년이 흐르고 지금에 와서는 한국에 두고 온 애플컴퓨터에 미련이 남네요.

지금은 다락방 어디엔가 처박아 있을 애플컴.....
2011.11.09 08:35  
"스티브 잡스의 천재성은 발명이 아닌 편집에 있다."

미국의 기자이자 작가인 말콤 글래드웰은 잡스의 진정한 천재성은 디자인이나 비전이 아닌, 개량을 통해 완벽한 제품을 만들어내는 '편집(editing)'에 있다고 지적했다. 글래드웰은 오는 14일 발간되는 잡지 뉴요커에서 이같이 논평했다.

그는 "잡스는 토머스 에디슨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는 비교 대상이 되지 않고 사무엘 크롬프턴의 방적기를 성공적으로 개량한 영국의 기계기술자 리처드 로버츠와 견줄 만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지난달 5일 잡스가 사망한 뒤 나오고 있는 칭송 가운데 '거대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 '발명가'라는 언급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을 거론했다. 그러나 실제 잡스는 이와 달랐다는 게 글래드웰의 주장이다. 월터 아이작슨이 쓴 잡스의 전기를 보면 잡스는 오히려 기존 제품을 적절하게 개량해 적용하는 '트위커(tweaker)'였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애플의 대표적인 제품들은 다른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한 결과라고 지적했다. 트위커는 기계, 특히 컴퓨터를 미세하게 개량해내는 사람을 뜻한다.

마우스와 아이콘을 이용해 조작하는 매킨토시 컴퓨터의 경우, 주요 부분의 특징을 제록스 PARC 연구소의 기술자들로부터 차용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 휴대용 디지털음악기기는 1996년 출시됐지만 애플은 아이팟을 2001년 내놓았다. 글래드웰은 "잡스는 시장에 나와 있는 음악기기들에 주목한 뒤 '정말 돈벌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지적했다. 스마트폰 역시 1990년대에 나오기 시작했지만 애플은 아이폰을 2007년에 소개했다. 아이패드의 아이디어는 잡스 가족의 친구와 결혼한 마이크로소프트의 기술자로부터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라고 글래드웰은 주장했다.

글래드웰은 애플 내에서도 잡스가 남의 아이디어를 가져오는 것으로 유명했다고 지적했다. 아이팟 등을 디자인한 조너선 아이브는 "잡스가 내 아이디어를 보고 '별로 좋지 않다'고 말해놓고서 나중에 청중 앞에서는 그 아이디어를 마치 자기 것인 양 설명했다"고 말했다.

아이폰과 아이팟, 아이패드가 남의 아이디어를 응용해 나온 것이지만 정작 잡스는 다른 사람이 애플의 제품을 손보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 제품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는 게 글래드웰의 설명이다. 그는 이런 잡스를 빗대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한 트위커는 자신의 제품이 다른 형태로 적용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글래드웰은 그러나 잡스가 뛰어난 재능을 발휘한 것은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도 완벽함을 추구한 점이라고 덧붙였다.

한편 데이비드 갤런터 예일대 교수(컴퓨터사이언스학)는 애플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훔쳐 아이폰과 아이패드 등 각종 제품에 적용하고 있다면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고 뉴욕타임스가 7일 전했다. 소송 배심원들은 지난해 10월 애플에 갤런터 교수가 소유하고 있던 회사인 '미러 월드'에 6억2500만달러(약 7000억원)를 배상하라고 평결했다. 그러나 지난 4월 재판장인 레너드 데이비스 판사가 애플이 특허를 침해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면서 이례적으로 평결 내용을 뒤집은 뒤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일요시사 2011.11.10 00:02  
"스티브 잡스가 삼성전자 갤럭시 스마트폰을 처음 봤을 때 '왜 내 제품을 모방해!'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나도 비슷한 분노를 느꼈다."

 제이 엘리엇 전 애플 수석부사장(누벨 CEO)의 회고다. 9일 전경련 국제경영원과 웅진씽크빅 등이 공동 주최한 CEO 조찬세미나에 참석한 엘리엇 전 부사장은 삼성전자와 애플이 벌이는 특허전에 대해 묻자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이 애플 아이폰과 상당히 닮았다"며 이같이 말했다.


 엘리엇 전 부사장은 잡스의 '멘토'로 불린 인물이다. 잡스보다 13세 손위로 기업 시장에 안주하던 IBM과 인텔 등 전 직장에서 나온 후 우연히 한 식당에서 25세의 잡스와 만났다. 이후 30분이 넘게 컴퓨터산업의 미래 이야기를 나누다 애플에 합류하게 된 일화는 유명하다. 존 스컬리에 의해 잡스가 애플에서 쫓겨날 무렵 함께 나와 픽사를 인수하는 데 가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이날 강연에서 삼성전자의 소프트파워 부재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했다. "삼성전자나 소니, 델은 절반만 가지고 싸운다"며 "삼성전자 광고를 보면 하드웨어 얘기뿐이고 결국 그 안에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이어 "삼성이나 소니 같은 기업들이 왜 자체 소프트웨어 개발을 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창의력은 하드웨어를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또 엘리엇 전 부사장은 "애플은 컴퓨터회사라기보단 '컴퓨팅'회사"라며 "제품을 통해 무엇을 할 것인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또 "시장 현황에 영향받지 않도록 '쿨'해지고 시장 최초가 돼야 한다"며 "애플 스토어를 처음 낼 때는 모두 다 실패할 거라고 했지만 지금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보다 유명한 랜드마크가 됐다"고 설명했다.

 한편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에 대해선 "모토로라와 구글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업을 인수할 때는 기업 자체가 아닌 사람과 기술을 인수해야 한다"며 "구글의 모토로라 인수는 큰 실수"라고 말했다.

 한국에 온 소감으론 "IT 분야 한국 젊은이들을 몇 명 만나봤는데 놀라운 창의력을 가지고 있었다"며 "한국 특유의 위계질서를 없애고 시스템을 만들어 이러한 창의력을 흡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잡스가 없는 애플의 미래에 대해선 "향후 5년은 지금의 혁신을 이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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