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그의 인생이 말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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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그의 인생이 말하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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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 그의 인생이 말하는 이야기




그렇습니다. 시민이 시장입니다"라고 그가 외치자 서울 시민들은 환호했다. 26일 서울시장 선거에서 박원순 후보가 당선됨에 따라 시민들은 이제 기존 정당이 아닌 새로운 정치 세력의 등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무소속 서울시장 당선자, 그것도시민이 추대하고 범야권이 당적에 상관없이 하나돼지지한 그가 서울시 살림을 책임지게 됐다.

유신체제에 저항한 학생운동가, 암흑과 같던 군사독재시절에 빛을 밝힌 인권변호사를 거친 박 당선자는 우리사회에 '조직된 시민의 힘'을 키울 씨앗을 뿌렸고 기부·나눔 문화를 일회성이 아닌 영속적인 시스템으로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지금은 '시민과 소통하는 시정', '시민이 주인인 시정'을 외치며 거버넌스를 확대할 구상을 내보이고 있다.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박 당선자는 13세 때 작은 할아버지의 양손으로 입양돼 6개월 방위 판정을 받았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은 그 과정이 석연치 않다며 병역기피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서울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하지만 유신체제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가 1학년도 채 마치지 못하고 제적을 당하게 된다. 당시 사회계열에 입학하면 법학과를 비롯해 경영학과, 정치학과, 행정학과, 사회학과에 갈 수 있었다. 박 당선자의 책이나 홈페이지에 서울대 법대 제적으로 학력이 표기돼 한나라당으로부터 학력위조 공방에 시달렸던 배경도 사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박 당선자는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의 런던 정치경제대학(LSE)에서 국제법을 수학한 후 한국에 돌아와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뒤 대구지방검찰청 검사로 임용됐으나 6개월만에 사표를 내버렸다. 사형이 집행되는 장면을 도저히 참관할 수없었기 때문이란다. 그와 함께 법조인이 된 인사들로는 조배숙 민주당 최고위원,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등이 있다.

그후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며 시민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는 박 당선자의 당시 선택에 대해 "그때 성질 죽이고 가만히 있었으면 지금쯤 검찰총장을 했을 것"이라며 "그와 같은 검찰총장만 있었어도 우리나라 검찰이 이렇게 썩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도 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이던 그는 승소율이 높은 변호사로도 유명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제기된 성희롱 관련 소송인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사건을 승소로 이끈 건 유명한 일화다. 관습이라 여겨진 직장 내 성희롱을 범죄로 인식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이 박 당선자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게 된 이유도 이 최고위원이 군사독재시절 학생 운동으로 법정에 섰을 때 변호해 준 인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박 당선자는 1995년부터 보폭을 넓혀 국내 대표적인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으로 활약한다. 2000년 16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는 "부정부패 혐의로 얼룩진 정치인, 독재정권에 아부한 정치인을 낙선시키자"는 낙선운동을 전개하며 대상자 86명의 명단을 발표, 총선을 앞둔 정치권을 뒤흔들었다. 당시대상자86명 중 59명이 공천심사나 선거 과정에서 떨어졌을 정도였다.

이 외에도 국민생활최저선운동, 사법개혁운동, 작은권리찾기운동, 소액주주운동, 예산감시 정보공개운동 등 그가 이끈 여러 사회참여운동으로 우리사회의 시민운동이 더욱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게 시민사회의 중론이다.

시민운동을 정착시킨 그는 기부와 모금 쪽으로 관심 분야를 넓힌다. 2000년 아름다운 재단을 설립하고 이를 토대로 사회적 기업인 아름다운 가게도 연다. 기부받은 물건을 재가공해 저소득층에게 저렴하게 팔고 그 수익을 기부하는 게 아름다운 가게의 프로세스(process)다. 박 당선자는 "아름다운 가게가 평상에서 시작했는데 지금은 전국에 120개가 넘는 매장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맨주먹으로 시작한 아름다운 가게는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추게 된 한국의 대표적인 사회적 기업이 됐다.

박 당선자는 '소셜 디자이너'를 자임하며 2006년부터 희망제작소의 상임이사로도 뛴다. 희망제작소는 공공기관에 시민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는'시민들에 의한 싱크탱크'를 표방한다. 박 당선자와 희망제작소는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이었을 당시 서울숲을 조성하거나 상암동 골프연습장을 없애는 일 등을 제안해 실천토록 한 것은 우리나라 최초로 거버넌스(민관협치)를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틈틈이 외국에서 공부하며 선진국의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하려고 노력해 왔다. 대학 졸업 후 런던 정경대에서 디플로마를 취득했고 인권변호사를 하는 중 미국 하버드대 법대에서 객원연구원 생활을 했다. 이 때 영국과 미국 도서관에서 입수한 수많은 자료와 현지에서 접한 시민단체 운영원리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는 데 영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언제나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던 건 아니다.

시민사회에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겼지만 시민사회계의 '독재자'로 불릴 만큼 자기 중심적이었고 주변에 끝없는 희생을 요구했다는 평가도 있다. 아름다운 가게의 인턴이 하루 식대 5000원을 받고 정규직에 버금가는 업무 강도에 시달렸다는 일화나 박 당선자가 아름다운 가게의 노조를 설립하지 못하게 막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더불어 '시민운동=박원순'이라는 구도를 만들 만큼 '포스트 박원순'을 키우지 않은 것도 시민사회가 박 당선자에게 아쉬워하는 요인 중 하나다.

기성 정치권이 인물난을 겪을 때면 으레 박 당선자를 영입하려던 것도, 그가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누누히 말해도 차기 대권주자로 자주 거론됐던 것도 우리사회가 갈구한 시대정신을 그가 대변하고 실천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이번 서울시장 선거출마를 고심했던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원장이 그에게 조건없이 후보 자리를 양보한 순간부터 드라마 같은 그의 선거 레이스는 시작됐다. 통합경선에서 정당 조직의 힘을 시민 바람으로 누른 그는 범야권의 지지를 받으며 무적함대와 같은 한나라당에 맞서 승리했다. 특히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한 '선거의 여왕' 박근혜 전대표도 더 이상 선거의 여왕 자리에 머무를 수 없게 된 건 우리나라 정치 지형에 중대한 변화가 올 거란 신호탄으로 볼 수 있다.

시민후보를 표방한 박 당선자가 실제로'서울 시민의 삶을 바꾼 첫 시장'이 될 수 있을지 주목되는 가운데 그는 마을버스와 전철을 타고 시청에 출근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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