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전희식의 '치매 어머니와 행복하게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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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전희식의 '치매 어머니와 행복하게 사는 법'

루루 0 1200

"늙고 병들어도 모든 어머니는 母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극렬 노동운동가였던 그, 모든것 버리고 귀농했는데
"아… 어머니…" 치매 치료 위해 산 속으로
"심신 부서진 건 제 탓… 어머니를 살리고 싶었어요"
수배당해 숨어다닐 때 어머니 눈에 피눈물이…
철저한 유기농 식사에 '모성 되살리기'심리치료… 의사도 놀랄 정도로 '회복'

터널의 끝을 지나자 눈보라가 춤을 추고 있었다. 봄색 완연한 남도(南道)에서 펼쳐진 때아닌 진경(珍景)이다. 그 무도(舞蹈)는 치매 앓는 88세 노모(老母)를 모시고 사는 농부 전희식(全喜植??)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졌다.

전북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306번지에서 모자(母子)는 살고 있다. 한때 극렬 노동운동가였던 농부는 어머니의 동반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뒤 1년간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세 가지 조건에서 한 치 오차도 없는 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해발 600~700m 고지(高地)가 사람 사는 데 가장 좋다고 믿었다. 배산임수(背山臨水)여야 했다. 촌부(村婦)가 살던 곳이되, 수십년에서 100년 가까이 인간의 살 냄새가 배어있는 곳이어야 했다. 그게 지금의 산속 집이다.

처마가 땅에 붙어 있던 귀신 나올 것 같던 폐허를 전희식은 6개월 동안 혼자 고쳤다. 대처(大處) 전주로 가 아파트단지에서 버려진 것 들을 집어왔다. 그걸로 기둥 세우고 보를 올렸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이 완공된 건 2007년 가을이다.

혁명가 아들이 고문을 당하고 집에 와 정신을 잃으면 어미는 밤새 울며 간호했다. 세월이 흘러 그 어미가 늙고 병들었다. 아들은 고물로 지어 올린 집에서 그와 함께 농사를 짓고 있다. 사계절이 지나고 흙에서 열매가 나오는 순리(順理)처럼 모자(母子)는 망각과 기억을 마주하기로 한 것이다. / 오진규 인턴기자
전희식은 어머니께 기자 일행을 데려갔다. 그가 '서울서 놀러온 분들'이라고 소개했다. 대뜸 노모가 일갈했다. "미친놈들이 서울에서 왜 놀러 와! 서울에서 뭣 하러 여기까지 왔어!" 3시간 뒤 집을 나설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모자의 사진촬영을 요청했을 때였다. 전희식이 어머니 마음을 돌려보겠다며 멸치를 들고 방으로 갔다. 그때 노모가 외쳤다. "그놈들이 다 처먹었네. 나, 사진 안 찍어!" 허망함에 터진 셋의 웃음이 산골짜기 속으로 뻗어갔다.

■ 혁명아

전희식의 가족 수(數)를 아는 이는 한 명도 없다. 지금 남은 건 6남매인데, 전희식은 아홉명이었다고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는 12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전희식은 "어머니는 뱃속에서 지워진 형제까지 계산한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43세 때 사망했다. 사진 속 아버지는 한량(閑良)이다. 하나같이 양복에 중절모 차림이었다. 아내와 포도송이 같은 자식만 세상에 남았다는 건 고생이 유산(遺産)이라는 뜻이다. 거창고 2학년 때 전희식의 삶이 요동쳤다.

―고2 때 중퇴했지요.

"당시 거창고의 학풍(學風)이 독특했습니다. 무(無)감독 시험에, 무인(無人)판매대를 운영했으니까요. 노무현(盧武鉉) 정권 때 청와대 인사수석을 지낸 정찬용씨가 당시 교사로 왔어요. 민청학련 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특별사면됐는데 당시 교장께서 면접 본 뒤 '똑똑하다'며 데려왔지요. 그는 역사과목을 맡았는데 유신(維新) 부분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시험에 나와도 할 수 없으니 알아서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그분 때문에 학교를 그만뒀다는 겁니까.

"서울대에 두 차례 낙방한 선배가 '공부는 해서 뭐하느냐'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당시 저는 프랑크푸르트학파나 칼 포퍼, 에릭 프롬 같은 비판철학에 매료돼있을 때였어요. 함께 자취한 선배의 말을 듣고 고2가 된 해 4월에 학교를 그만두고 5월에 검정고시를 봐 합격했습니다."

―그래도 선배 때문에 그런 결정을 했다는 건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저항적이었다고나 할까. 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때 급우들끼리 돈을 20~30원씩 모아 격려 광고도 냈고 창비(創批)니 '씨알의 소리'같은 잡지도 탐독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뒤엔 무작정 서울 청파동에 사는 함석헌(咸錫憲) 선생 댁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선배 말에 귀가 번쩍했던 건 그런 기질이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머니가 깜짝 놀랐겠습니다.

"말도 못하지요. 하지만 전 제 선택이 올바르다고 믿었어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엔 기능사 자격증을 여러 개 땄어요. 전기·전자·보일러 같은. 그걸 바탕으로 일신제강에 기능공으로 취직했지요."

―거기서 뭘 했습니까.

"노조(勞組)투쟁을 지원하는 일을 했습니다. 일신제강에선 오래 근무하지 못했어요. 노보(勞報)에 짧은 소설을 기고한 게 문제가 됐거든요. 25매짜리로 제목은 '메리크리스마스'였습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 증오를 담은 내용이었는데 그걸 보고 회사에서 나가라더군요. '아스팔트 키드(Asphalt Kid)'가 됐지요."

―글 한 편에 회사를 그만두다니.

"제가 쓴 글이 처음 활자화된 건 조선일보였어요. 현대그룹 고(故) 정주영 회장의 '나의 경영철학'이라는 프로그램이 TV에서 방영됐습니다. 제가 '나의 노조철학'이란 반론 성격의 글을 독자투고란에 보냈는데 그대로 실리더군요."

―그 뒤 옮긴 데가.

"대우자동차였습니다. 거기서도 대규모 파업을 조직했지요. 1985년에 굉장한 파업이 일어난 후 해고됐습니다."

―전직(前職)이 과격 노조운동가였네요.

"당시 같이 활동했던 분들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심상정 전 의원, 김문수 경기도지사, 김근태 선배 같은 분들이었어요. (김)문수 형과 친했습니다. 제가 방송통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는데 그분이 박현채, 김낙중 교수 같은 분들을 연결해줘서 경제학 공부도 했습니다. "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사건에도 연루됐지요.

"대우차를 그만둔 뒤 민주노총의 전신(前身)인 전노협(全勞協)에서 대기업 노조 특위 소속으로 일했습니다. 특위라고 해도 언더(Under·지하)활동을 한 것이었습니다. 배일도 전 서울지하철 노조위원장이나 홍영표 민주당 의원들과 그때 함께 일했습니다. 그러다 인천 사태가 났어요. '남영동'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습니다. 묵비권을 행사해 풀려났는데 나중에 수배가 돼 5~6년을 피해다녔습니다."

―1992년 총선에도 출마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민중당 소속으로 인천 부평갑구에 나갔지요. 8.6%를 득표해 3위를 했습니다. 선거 후 '김낙중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조사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어디서.

"안기부로 끌려갔습니다. 사흘 동안 집중적인 고문을 당했습니다. 온몸을 발가벗기고 성기(性器)를 주무르고…. 자아(自我)를 상실시키려는 저열한 수법이었어요. 정신이 온통 흐물흐물해졌어요. 그 뒤 1년 넘게 거의 폐인(廢人)처럼 지냈습니다."

전희식이 책을 들여다보고 있다. 찬바람을 겨우 막아주는 비닐 문 앞에서. 그는“요양 원에서 젓가락으로 구슬 집는 의미 없는 행동보다는 함께 호박 썰어 요리하고, 청소 하는 게 낫다”고 했다. / 문갑식 기자
■ 귀향

노동자 천국을 만들려던 그는 '망가진 노동자'가 됐다. 당장 해야 할 일은 혁명이 아닌 건강을 되찾는 것이었다. 자기 오줌까지 마셔봤지만 효과를 못 본 그는 경기도 발안으로 갔다. 야마기시(山岸) 명상수련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1주일에 불과했지만 거기서 전희식은 한 개체로서의 인간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가를 깨달았다. '야마기시회'는 수련뿐 아니라 노동의 위대함도 가르쳤다. 내친김에 그는 머리를 깎고 전남 순천의 송광사로 출가했다.

―야마기시 명상수련법이 뭔가요.

"야마기시 미요조(山岸巳代藏·1901~1961) 선생은 일본 군국주의가 기승부릴 때 사회주의 운동을 한 분입니다. 요즘 법정(法頂)스님의 '무소유'가 화제지요? 그도 무소유 공용일체 사회를 만드는 걸 평생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야마기시 명상수련법은 아주 특이해요."

―어떻게요.

"수련자에게 지도하는 분들이 묻습니다. '당신은 왜 화가 납니까?' 뭐라고 대답하면 '왜 화를 내야 합니까?'라고 물어요. 다시 대꾸하면 '화를 안 내면 안됩니까?' 하는 식이지요. 그걸 못 참고 뛰쳐나가는 수련생들이 많았아요. 자기 스스로의 동인(動因)이 없으면 견디기 힘들지요. 명상수련뿐 아니라 청소도 시키고 풀 베는 일도 시킵니다."

―얘기를 듣다 보니 온통 과격노조 결성에, 간첩단사건으로 수사도 받았고 아는 분들도 하나같이…, 혹시 좌팝니까?

"전 체제변혁적 사고가 일면적이었다고 느꼈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이나 케인스 이론,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같은 책을 좌파들은 절대 보지 않지요. 전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의 주력군(主力軍)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야마기시 명상수련으로 건강만 회복하면 됐지 왜 머리는 깎았나요.

"제가 한번 빠져들면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입니다. 고대(古代)로 내려오는 수련법에 여러 가지가 있어요. 화두선, 염불선, 묵조선(默照禪) 같은. 명상수련을 배우니 불가(佛家)의 수련도 배우고 싶어졌지요. 삼천배도 해보고 오천배도 해보고 단식수련도 해보고."

―왜 1년 만에 환속(還俗)했나요.

"수련을 하며 내 스스로가 가라앉는 듯한 느낌도 들었고 '이젠 그만 나가자'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내도 있고 아이도 있었고요."

―당시 이미 결혼을 했었습니까.

"동갑내기 아내(조현숙)와는 노조운동을 하다 만났어요. 서로 결혼하자는 이야긴 한번도 꺼낸 적이 없지만 주변에선 '둘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아내는 지금 요가 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요가?

"노동운동가로선 아내가 저보다 더 치열했어요. 전 고문만 받았을 뿐인데 아내는 투옥(投獄) 생활도 했거든요. 거기서 건강을 유지하려 요가를 배웠답니다. 그걸 사회에 나와서 써먹고 있는 거지요."

―절을 나와서 간 곳이 전북 완주(完州)지요, 1994년에?

"농민회 운동을 하던 대선배가 계셨어요. 그분은 항상 '농사만이 죄짓지 않고 사는 법' '생명의 밥상을 차리는 것은 선한 행동'이라고 말씀하셨어요. 제게 완주에 와 살아보라고 권유하시더군요."

―고향이 경남 함양이니 금세 농사에 적응했겠지요.

"처음에는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도시에서 살다 농촌으로 가면 갑갑하겠지요.

"농사를 나중엔 700평에서 1200평까지 지었습니다. 가계부를 써보니 월 생활비가 27만~28만원밖에 안 들어요. 고기와 술을 끊고 아이들을 대안(代案)학교에 보내니 지출이 10분의 1로 줄어들지요. 농촌에선 일 자체가 공부도 되고 놀이도 됩니다."

―일 자체가 공부도 되고 놀이도?

"식량기근이나 토양에 대해 생각도 해보고, 날씨 걱정하다 보면 기상학 공부도 되고 아궁이에 불 때다 보면 열역학(熱力學) 공부도 되는 식이지요."

■ 백발체모

세상을 종횡하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서울 신림동 큰형 집으로 갔다. 전주시에서 선발한 10일간의 북유럽 4개국 시찰단에 뽑혀 다음날 인천공항으로 가야 했다. 그런 그에게 몇년 전부터 치매를 앓는 어머니가 말했다.

"네가 좀 봐줘야겠다." 영문 모르는 아들 손을 잡고 어머니는 누가 볼세라 구석으로 가더니 자기 아랫도리를 보여줬다. 기저귀를 찬 곳이 다 헐어있었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온통 하얗게 센 어머니의 체모(體毛)였다.

―그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아무리 노인이라도 그 부위의 체모가 하얗게 변한 건 보지 못했어요. 그곳이 우리 자식들을 생산한 곳 아닙니까. 충격이 처음엔 서서히 오더군요, 그러다 나중엔 엄청나게. 일요일이어서 동네 약국들이 다 문을 닫았어요. 정신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울면서. 겨우 한 약국에서 파우더를 사다 발라드렸지요."

―그때 어머니를 모실 생각을 했나요.

"유럽 시찰 내내 그 광경만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준비가 필요했어요. 노인요양병원을 찾아가 실습도 하고 장애 노인을 다루는 법도 배우고 치매에 관한 책도 읽었습니다."

―치매 앓는 어머니를 모실 때는 아내의 동의가 필요할 텐데.

"전 계획을 말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내가 예스라고 해도 곤란하고 노라고 해도 곤란하잖아요. 모든 준비를 끝낸 후에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한참을 침묵하더군요. 그러곤 묵인성 동조를 해줬습니다."

―왜 고향으로 가지 않고 장수로….

"어머니가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막 말씀하시잖아요. 재가(再嫁)한 이보고 '무슨 서방한테 난 애 잘 크냐', 이런 말을 하면 본인들이 어떤 기분이겠어요. 잘못하면 왕따 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 집이라도 번듯하게 짓지 그랬습니까.

"남들이 버린 고물(古物)이니 쓰레기니 하지만 전 그걸 보면서 '이 사람들 천벌 받겠구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어머니가 겨울에 눈이 많이 온 날 낙상해 대퇴부 뼈가 모두 바스러진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했습니다. 화려하게 부활하는 고물처럼 어머니도 그렇게 되길 바랐지요."

―이곳에서 산 지 3년이 됐습니다. 차도는 있나요.

"치매를 앓는 분들은 낯모르는 사람이 오면 '날 잡으러 왔다'고 생각합니다. 대인 기피증 비슷하지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친구 중에 노인병원 원장이 있는데 와보고 놀라요. '치매는 증상을 완화시키는 정도인데 훨씬 나아진 케이스는 처음 본다'고요."

―왜 심리적으로 위축이 될까요.

"수배생활을 하던 당시 제가 이렇게 시켰어요. '집에 이상한 놈들이 오거나 빠릿빠릿한 놈 둘이 괜히 볼 일도 없으면서 집안을 기웃거리면 집 앞 두 번째 전봇대에 빨간 크레용으로 표시를 해놓아라, 연립주택 2층 베란다에 빨간 수건을 걸어놓아라' 하는 식으로요. 전 그때 어머니가 아무 영문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아시던가요?

"노회찬 대표와 그 부인이 제 집에서 모임을 가졌을 때였습니다. 담요로 불빛을 막고 이야기하다 나와보니 어머니가 구석에서 부들부들 떨고 계셨어요. 집에서 문건을 불태운 날은 이런 말을 하시더군요. '옛날 빨갱이가 그러다 다 죽었다. 네 놈들이 다 그짓하고 있다'고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수배를 피해 집을 나갔다가 이틀 만에 돌아와 보니 구석에 보따리를 싸놓고 계셨어요. '못살겠다, 전철에 몸을 던지려 했다'고 하셨어요. 통닭구이 고문을 당하고 집에 와 정신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깨고 보니 어머니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어요. 제 몸에 더운물로 찜질을 해주면서요. 자식이 당하고 살면 부모는 견딜 수 없지요. 어머니 심신이 부서진 건 제 탓입니다."

―2008년에 어머니와 함께 산 기록을 책으로 냈지요. 책 제목이 '똥꽃'인데 그게 무슨 뜻인가요.

"밭에 감자를 심고 돌아와 보니 벽에 온통 똥칠을 해놓았어요. 그게 아주 잘 익은 된장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감자 심은 부근에 나는 진달래꽃과 뭐가 다르겠어요. 배설물은 팔십 평생 삶의 흔적이지요."

―고령화사회가 되면서 치매 노인도 늘고 있습니다. 그들이 모두 전 선생처럼 살 순 없겠지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광경들이 많습니다. 형제가 서로의 집 대문에 부모를 버리고 오는가 하면 장례식에도 오지 않지요. 그런 일들이 주변에 많지만 전 누구나 가능하다고 봅니다. 요령을 습득해선 안 되고 자기 스스로를 상하지 않으면서 치매 걸린 부모를 북돋아주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면 가능하지요."

■ 자연치유력

그의 치매 치유는 '자연'으로 요약된다. 그는 석유화학 용기를 거부하고 유기농 자연식품만 먹는다. 곤충에 대한 살생(殺生)도 금한다. 1년에 파리, 모기가 1주일 정도밖에 나타나지 않는 해발 600~700m 고지를 택한 것도 그런 이유다.

기자가 찾아간 날 아침 그는 어머니와 호박죽을 먹었고 점심때는 떡국을 먹었다. 메뉴를 정할 때마다 그는 어머니에게 묻는다. 자기 결정권을 주기 위해서다. 그는 "제가 어머니를 치유한다며 너무 부려먹는다"는 말도 했다.

―그게 무슨 뜻인가요.

"수제비를 만들면 어머니는 호박을 썹니다. 청소도 같이 하고요. 밭에서 일할 때도 동행해요. 제가 하면 1시간에 할 수 있는 일을 3시간 걸려 하는 까닭이 있어요. 한 치매 요양원에 가니 이런저런 프로그램으로 노인들을 몰고 다니더군요. 젓가락으로 구슬 집는 게 있는데 좋은 운동이긴 하지요. 그렇지만 본인이 납득하지 못할 행동에 무슨 치유력이 있겠어요?"

―그렇게 하면 차도가 있나요.

"'똥꽃'이라는 책을 썼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대소변을 본 옷을 제가 볼세라 둘둘 말아 이불 속에 숨겨놓으셨어요. 아들한테 쫓겨날까봐요. 지금은 벗어서 찬물에 빤 뒤 꼭 짜고 저를 부릅니다. '희식아! 이거 널어라'라면서요. 그게 바로 심리적인 회복이지요."

―최근에 나온 책 '엄마하고 나하고'를 보면 치매 노인에 대한 전희식식(式) 세 가지 요법이 나오더군요.

"치매를 앓는 분들이 고집 부리는 건 꿈과 현실이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서리가 하얗게 내린 아침에 고향에 가서 감자를 캐오자는 겁니다. 50년 전 같이 살던 향곡댁이란 분 이야기도 하고요. 그때 제가 선수를 쳤습니다."

―선수라뇨.

"진짜 가보자고요. 밖에 나가 현실을 보면 아무리 치매를 앓는 분들도 깨닫게 됩니다. 그럼 다시 현실로 되돌아오지요. 전 이걸 '앞장서서 방향돌리기'라고 불러요. 치매 노인의 터무니없이 강경한 주장은 그동안 아무도 그분의 말에 귀를 기울여준 사람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는요.

"치매 노인들은 꿈을 현실로 착각합니다. 새벽에 잠꼬대라도 하면 얼른 맞장구를 치지요. 전 잠 속에서 진행되는 망상(妄想)이 꿈이라면 눈 뜨고 진행되는 망상을 치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제가 동의하고 그 과정을 같이 걸어주면 대부분 현실로 돌아옵니다."

―세 번째는 '모성 되살리기'지요.

"어머니가 새벽부터 쑥을 뜯으러 가자고 성화를 부린 적이 있어요. 쑥을 뜯으려면 몇번이나 자리를 바꿔야 되는데 그때마다 휠체어에 앉아계신 어머니를 들었다 놓았다 해야 합니다. 그 고생을 해서 쑥을 뜯어오면 소쿠리 가져와라, 물 떠 와라, 닭모이 줘라, 마루에 신문지 깔아라 하며 성화를 부리지요."

―지쳤겠네요.

"그런 저를 한참 보던 어머니가 말씀하셨어요. '네가 나를 두발 리어카 밀고 위로 아래로 옮기느라 욕봤다. 올매나 고생이 많았노, 이 쑥국 한그릇 먹어라'라고요. 아무리 늙고 병들어도 세상 어머니는 여전히 여잡니다. 모성(母性)을 본능적으로 간직하고 계시지요."

―자연치유도 좋지만 왜 의술의 도움은 외면하나요.

"고문받을 때 기억 때문입니다. 죽으면 안 되니 꼭 의사를 데려오는데, 그 의사들이 저와 눈빛을 맞추지 않았어요. 시골에서 소나 돼지가 병들면 입을 강제로 벌려 약을 넣어주거나 주사를 놓죠. 제가 딱 그 꼴이었습니다."

―노인요양원들은.

"지나치게 자본의 논리에 빠져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례로 요양보호사가 우리 집에 오면 그 뒤에 꼭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확인전화가 와요. 부당청구 때문이지요. 그러니 어른에 대한 공경(恭敬)은 오간데가 없어지지요."

―듣고보니 그렇습니다.

"제가 떡국에 넣을 떡을 썰면서 '잘 썰지요'라고 하니 어머니가 '난 떡 열되를 썰었다, 넌 등에 업혀 오줌 싸지, 큰 애는 밥 달라고 하지'라고 하셨어요. '제가 오줌을 쌌어요?'라고 하니 '오줌 안 싸면 병신이지'라고 말하셨어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노인이 돼서 치매에 안 걸리는 게 병신이라고. 요즘 주변에 사회적 치매가 오죽합니까."

―사회적 치매라뇨.

"이동식 욕조를 샀어요. 요양간호사가 제 사인받아 올렸는데 보험공단 직원이 찾아왔어요. 방을 힐끔거리며 '이동식 욕조 어딨어요?'라고 하면서. 서로를 못 믿는 게 사회적 치매잖아요."

전희식은 모처럼 찾은 객(客)이 반가운 듯했다. 연방 어머니 방을 드나들며 상태를 살피면서도 귀농(歸農)을 이야기했고 주말 체재형 생태농원을 말했으며 유럽과 일본의 농촌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관찰기를 늘어놓았다.

오후 1시 전 시작된 대화가 3시간이 넘어 끝났다. 그는 '막걸리라도 한잔하고 가라'더니 자꾸 뭔가를 주려 했다. 맨 마지막에 그가 손에 쥐여준 건 계란 한 꾸러미였다. 그날 밤 계란프라이를 안주 삼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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