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이야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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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이야기(4)

daniel1 0 761

안녕하세요 이동구 한의원 입니다


"비정상적인 기능을 가진 세포들이 인체의 적절한 통제기능을 벗어나 무제한 증식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생성된 덩어리" - 현대 서양의학이 내린 암에 대한 정의입니다. 따라서 살아있는 세포가 있는 곳이라면 즉 세포분열이 일어나는 곳 어디에서나 암은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손톱과 발톱, 머리카락 그리고 피부각질층에서는 암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이 조직들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아니하며 더 이상 세포분열을 하지않기 때문입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암의 종류는 약 200여종. 인체의 각 장기나 기관마다 평균 5-10 여종의 다른 특성을 가진 암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동양의학이 암을 "인체에 생긴 불필요하게 자라는 덩어리"로 보았던 견해는 시대적으로 서양의학에 조금 앞선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그들에게 세포란 개념은 없었지만(기실 아직까지도 없지만) 서양의학보다 조금 일찌기 그들은 신체의 특정한 변화에의해 핏덩이를 포함하는 "혹"이 인체 주요 장기에서 자란다는 것을 알아내었습니다. 암을 한의학적으로 정의한다는 것은 서양의학에 비하면 무척 단순합니다.  그 까닭은 한의학의 인체에 대한 접근 방법이 애시당초 서양의 그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쪽은 인간을 단세포에서 분열한 복합적 유기체로 보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인체를 하나의 "소우주"로 보기 때문이지요. 한의학이 비록 암의 병리학적 전개나 현미경적 현상을(microscopically) 설명하지는 못하나, 어쨋거나 외관상 크게 보면(macroscopically) 두 학문의 암에대한 정의는 일치하는것으로 보여지며, 암의 발생 원인에 관하여서도 서양의학과 공통점을 가지는 부분이 상당히 있다고 보여집니다.



*** 퍼온 글 ***


2010년 1월 중국 우한시(武汉市) 구봉산 중턱 한 중년 남자가 흰 장갑을 낀 손으로 나란히 붙은 두 묘의 묘비를 먼지 한점 없이 닦고 있었다. 그는 묘 앞에 가져온 과일과 황색과 백색의 국화를 놓고 “정협아, 원야야, 너희 두 모자 드디어 만났구나. 너희들 내 이 아픈 심정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천당에서 편안하고 행복하기를 빈다”
이 중년 남자는 중국과학원물리수학연구소의 고급엔지니어인 원학군 씨이고 묘에 묻힌 사람은 그의 아내인 당시 54세의 정정협,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그들의 아들인 26세의 원야다.
2007년 원학군 교수의 부인이 몸이 불편하여 병원 진단을 받은 결과, 위암 말기였다. 이미 암세포가 다른 곳으로 전이되어 6개월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고 2007년 3월 17일 1차 수술을 받고 투병생활에 들어 갔다.
입원한 원교수 부인 정정협씨는 우한체육학원의 의사로 봉직 중이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원야라는 톈진대학교 대학원생인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석사학위 논물 준비로 집에 와 있었으나 논문 작성이 부진하여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다 모친의 와병, 그리고 희망하던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는 등 근심이 늘어나면서 평소의 우울증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다.
하루는 원교수가 병원에 갔다가 귀가해 보니 아들이 심한 우울증을 이기지 못하고 약을 먹고 신음 중이어서 급히 병원으로 옮겨 응급처치를 했으나 아들은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원교수는 친적들에게 아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부인에게 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다음날도 태연히 병원에 가서 투병중 인 부인을 격려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부인은 애지중지하는 아들이 며칠 보이지 않자, 남편에게 왜 아들이 안 오는가라고 묻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인 핸드폰에 문자 메시지가 날라 왔다.
“보고 싶은 엄마! 열차 탈 시간이 너무 급해 엄마에게 인사도 못하고 왔어요. 저 박사학위과정 준비를 위하여 톈진에 와 있어요. 여기 숙소도 좋고 당분간 공부하기에 불편이 없을 것 같아요. 엄마 건강하게 다시 뵐 수 있게 힘내세요”
이 메시지는 원교수가 아들이 남기고 간 휴대폰을 이용하여 보낸 것이었다. 원교수는 가슴이 찢어지는 심정으로 이 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시작된 메시지는 하루에 2, 3차례 병석의 엄마가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원교수가 병원에 가면 부인은 아들의 메시지를 남편에게 이야기 하면서 아들을 자랑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들에게 여자친구가 생겼답니다"라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원교수는 출근 했을 때는 물론이고 출장 갔을 때 또는 세미나 중에도 아들 휴대폰을 품에 넣고 다니면서 사시사철의 변화, 톈진의 풍물, 나라 안팍의 소식 등을 병석의 엄마에게 전했다.
당초 6개월을 못 넘긴다고 했던 부인은 2007년, 2008년을 넘기고, 2009년은 한차례 수술을 더 받으면서 버티었다. 엄마의 유일한 생명줄은 핸드폰이었고 그것이 생활의 전부였다.
그러던 중 2010년 1월 초 병세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그녀가 의식이 있을 때 받은 마지막 메시지는 “엄마, 이번 설에는 엄마한테 갈게 그때까지 버티고 있어 줘. 나 엄마가 좋아하는 것 많이 사갈게”
그렇게 엄마는 2010년1월19일 밤 11시 40분 눈을 감았다. 원교수는 21일 아들의 유골을 엄마 묘소 옆에 이장했다.
이 이야기는 당시 우한신문에 보도되었었고 인터넷을 타고 많은 사람들을 울렸었는데, 11월 28일 톈진 발해조보가 관련 사진과 함께 다시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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