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 68주년을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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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68주년을 맞아

이제훈 0 437
                                     이제훈     한겨레신문   국제부장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러 8월13일  서울에 왔다.

정상회담 예정 시각보다 일찍 숙소를 나선 아베 총리의 차량이 세종로를 질주하다 옆길로 샜다. 일본대사관 앞에 멈춘다.

 

아베 총리가 차에서 내리더니, 일본군 위안부를 기리는 ‘평화의 소녀상’ 앞에 꽃을 바치고 무릎을 꿇는다.

예정에 없던 일이다. 더구나 무릎 참배라니. 놀라 몰려든 기자들의 질문 공세에 아베 총리는 묵묵부답이다. 한바탕 소동을 뒤로하고,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 장소인 청와대로 향했다.

 

다음날, 한국과 일본의 일간지 1면 머리기사는 예외 없이 소녀상 앞에 무릎을 꿇은 아베 총리의 사진이 차지했다.

꿈이다. 현실이 아니다. 하지만 망상은 아니다. 유사한 전례가 있다.

 

 

1970년 12월7일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 앞.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가 섰다.

1943년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이 나치에 맞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6000여명이 참살당한 일을 기리는 탑이다.

 

잠시 고개를 숙인 브란트가 뒤로 물러섰다. 의례적 참배가 끝났다고 여긴 일부 기자들도 따라 몸을 뺐다. 그때, 브란트가 기념비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미친듯이 터졌다. 브란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독이 폴란드와 관계정상화를 위한 바르샤바조약을 맺는 날 아침, 브란트는 나치 독일의 잘못을 온몸으로 사죄한 것이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인 요제프 키란티예비츠 폴란드 수상은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브란트는 훗날 자신의 행위를 이렇게 설명했다.

 

“독일의 가장 치욕스런 역사를 증거하는 곳에서,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말로써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

 

 역사적으로 독일인에 대한 폴란드인의 감정은, 일본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폴란드인은 바르샤바에 브란트 광장을 만들어, 무릎을 꿇은 브란트의 모습을 담은 기념비를 세웠다.

 

사죄와 용서와 화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후 일본엔 브란트 같은 지도자가 없었다.

A급 전범 용의자인 외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를 존경한다는 아베 총리는 침략의 역사를 부인하며 평화헌법 무력화에 여념이 없다.

 

 

1944년 8월25일 프랑스가 4년 2개월간의 나치 점령에서 벗어나자, 임시정부 주석인 샤를 드골은 나치 부역자를 발본색원했다.

 

6763명이 사형 선고(767명 처형)를, 4만여명이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나치 부역 언론(인)이 특히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694종의 신문·잡지가 폐간·몰수됐고, 잡지 <오토>의 사주인 알베르 르쥔 등 여러 언론인이 처형됐다.

 

드골은 말했다.

“프랑스가 다시 외세의 지배를 받더라도, 또다시 민족반역자가 나오는 일을 없을 것이다.”

 

한국엔 드골이 없었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해체시켰고,

김구 선생은 해방된 조국의 분단을 막으려다 살해됐다.

 

광복 68년째인 2013년,

한국 정부는 항일투사들을 사냥한 간도특설대의 백선엽을 기리는 상을 제정하고,

박근혜 대통령은 만주군관학교 수석 졸업자인 다카키 마사오 또는 오카모토 미노루(박정희의 일본식 이름)의 ‘유훈’을 실천하는 데 여념이 없다.

 

 

“과거에 눈을 감은 자는 현재에도 눈이 멀게 된다.

죄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우리 모두가 과거를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옛 서독 대통령의 당부를 무시하는 건 아베의 일본만이 아니다.

 

역사의 복수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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