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차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통해 드러난 저들의 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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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차 "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통해 드러난 저들의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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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C.C.(World Council of Churches)

세계교회협의회 총회를 통해 드러난 저들의 정체


W.C.C.(세계교회협의회)란 세계의 그리스도교파 간의 연합기구를 말합니다. 한국 교회는 K.N.C.C.(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라는 이름으로 W.C.C.에 가입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K.N.C.C. 가입교단은 총 9개교단으로서 다음과 같습니다. < 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② 기독교대한감리회    ③ 한국기독교장로회    ④ 대한성공회    ⑤ 구세군 대한본영    ⑥ 기독교대한복음교회    ⑦ 한국정교회    ⑧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순복음)    ⑨ 기독교한국루터회 ☞ 2011.11월 가입>. 위 교단들 소속의 성도 님들께서는 본 문서를 더욱더 분별하여 읽으셔야 할 줄 믿습니다.


W.C.C.가 발족되기 전, 소련의 스탈린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평화연맹’을 조직하였습니다(1947.9). 이 단체는 주로 소련공산당 지도자들과 위성국의 공산주의자들로 구성되었는데, 기독교회 침투를 위한 세계적화 사령부격이었습니다. 스탈린은 러시아 정교회의 신학생이었음을 기억하십시오. 그는 러시아 교회의 타락상을 보고 “하나님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다”는 마귀적인 감화아래 레닌과 힘을 합쳐 노동자 농민을 선동함으로 공산주의 피의 혁명을 이루어 낸 자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따르던 자가 타락하면 무신론자가 되고, 자본주의가 부패하면 반갑지 않은 도적 ‘공산주의’를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붉은 말(계6:4, 8:7)의 혁명 기간동안 러시아는 자민족 약 5,000만명을 희생시켰습니다(1917-1957). 이러한 살인집단이 아무런 회개도 없이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 때(1958.3.18) 갑자기 색깔을 바꾸어 <평화공존, 핵무기제한, 핵실험금지> 등의 소위 평화공존 정책을 들고 나왔으니, 이는 위장된 궤휼(거짓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계6:8). 무신론 공산주의 집단이 피흘림의 타도정치를 끝내고, 공존하자는 궤휼로 색깔을 바꾸고 나오면서 적극 이용한 것이 바로 W.C.C.라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전략과 전술이 있는데, 전략은 요동치 않는 거시목표이며, 전술은 그것을 이루어내는 다양한 방법들입니다. 아직까지 변치 않고 있는 저들의 목표는 바로 ‘세계적화’이며, 그 성취를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가 바로 “교회 속으로 침투하자”는 착상이었습니다. 세계적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선택된 뛰어난 기만전술의 장! 그 무대가 소위 ‘세계교회협의회’라 이름하는 W.C.C.인 것입니다. 지금부터 W.C.C.의 발자취를 살펴볼 때에 가입교단 내의 순진한 성도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게 될 것입니다



제1차 총회

1948년 8월 13일,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44개국 147교회가 모였습니다. 스탈린이 1947년 9월 바르샤바에서 <서방교회 침투전략>을 세우고 <평화연맹>을 조직하여 1948년 8월 W.C.C. 1차총회에 약 60~70 여명의 동유럽 공산국가 정보요원들을 위장 침투시키는데 성공하였고, 체코 출신의 ‘흐루막카’와 폴란드 출신의 ‘나즐로 패트’가 W.C.C.중앙위원에 임명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죽기 3년 전(1950.4), 바르샤바에서는 세계평화회의(W.P.C.)라는 공산권 교회기구가 조직되었는데, 여기에 68개교단 98명이 참가하여 W.C.C. 2차총회 잠식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1953년 6월, 스탈린이 사망한 후 흐루시쵸프는 스탈린의 종교침투정책을 계승하면서 그 조직을    <세계기독교평화회의>로 확대하였습니다(1958.11). ‘평화공존’정책으로 유명한 그는 겉으로는 위장평화에, 속으로는 서방침투에 온 노력을 기울였고, 1967년 3차회의 때는 K.G.B.두목인 니코딤을 ‘세계기독교평화회의’ 의장에 임명함으로써 공산당의 세계교회침투를 적극 장려하였습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공산당)의 궤휼정치는 1975년 1월 <아시아기독교평화회의> 등의 관련기구들의 확대로 더욱 탄력을 받았으며, 이로써 많은 공산주의자들이 교회(W.C.C.) 안에서 활개를 치게 되었습니다.


제2차 총회

1954년 8월, 미국 에반스톤에서 열렸으며 “현대의 정치적 정의는 공존”이라는 모토를 내세웠고, ‘그리스정교회’가 인정됨으로써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터키의 정교회가 정식회원으로 가입되었습니다. 이 총회에서는 “세상의 모든 악을 퇴치시키기 위한 사회주의 건설이 W.C.C.의 지상목표”라는 신앙고백을 선언함으로써 스탈린의 평화공존 결의안을 지지하였고, 우리나라도 이 2차총회 때 가입신청을 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보수-진보가 갈라지기 시작한 분기점이었고 쓰라린 6.25 전쟁의 상처가 가시기도 전에 발생한 또다른 사상전(색깔론)의 시작이었습니다. W.C.C. 찬반론을 놓고 교회가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당시 보수교단들은 반대연설을 하고 퇴장하였으나 기장, 기감, 예장(통합) 측은 N.C.C.K. (National Council of Church, Korea)의 이름으로 W.C.C.에 가입함으로써 사탄의 마수(魔手)가 동방 땅 끝에까지 뻗어 오게 된 것입니다.

붉은 짐승들이 이처럼 양의 탈을 쓰고서 W.C.C.와 그 산하 단체인 “아시아교회협의회(C.C.A.), 기독교교회협의회(N.C.C.), 산업선교회(U.I.M.), 기독학생총연맹(S.C.F.)” 등으로 영향력을 확대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된 것은 무섭고도 놀랄 만한 사실입니다. 사단도 ‘광명의 천사’(고후11:14)로 가장하므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해 무지합니다. 바꿔말하면 이는 기독교가 눈이 가리워진 채 깊은 잠에 취해 있다는 뜻도 될 것이니, 예언서로 각성받아 잠을 깰 때는 지금인 것입니다. 스탈린을 격하시키며 서방세계를 속이고 나온 소련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쵸프는 제3차 총회에 대비하여 체코 프라하에서 “세계기독교평화회의”를 조직했고(1958.11), 여기에 서방교회 600 여명이 참가하였는데, “동서공존”이라는 흐루시쵸프의 위장정책이 먹혀든 결과입니다. 흐루시쵸프는 <기독교와의 평화공존을 강령화>했으며, 제3차 총회에 대하여 숙의했습니다. “평화전술”은 꿀바른 독약에 불과합니다. 김홍도 목사의 『공산주의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글을 보면 흐루시쵸프가 서기장이 된 후에 한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련의 모든 기독교인들을 다 없이하고 마지막 한 사람을 전국 모든 사람이 TV로 볼 수 있게끔 한 다음에 죽여버려 소련 땅에서 교인 씨를 완전히 말려 버리겠다.” 그러나 그가 이 일을 시행하기 전, 하나님이 먼저 그를 데려가셨습니다.


제3차 총회

1961년 11월, 인도 뉴델리에서 개최되었습니다. 대회 대표들은 “세계의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란 표어 아래서“타 종교들도 세계에 빛을 발하고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발족된 지 13년 만에 마귀적 본질을 대놓고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당시 소련 K.G.B.(국가보안위원회) 요원이면서 동시에 ‘세계기독교평화회의' 의장인 ‘니코딤'은 3차 총회에 소련교회 대표 자격으로 16명을 인솔하여 루마니아, 폴란드, 불가리아와 더불어 정식회원으로 가입하였으며, 이때 그는 W.C.C. 중앙위원에 임명됨과 동시에 W.C.C. 회장으로 당선되었습니다(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이 일의 배후에는 흐루시쵸프의 세계적화야욕이 숨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니코딤은 이 대회에서 예수만이 세계의 유일한 구세주(행4:12)이심은 전혀 말못하고 흐루시쵸프의 공산당노선을 선전했으며, “마르크스주의(marxism)는 정의로운 사회구현을 위한 필수이념”이라고 하는 성명서를 채택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이 정식회원국이 된 것도 이 3차 대회 때입니다(참된 성도라면 이러한 사악한 영적 배경을 이해하고 대한민국 기독교회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회개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W.C.C.는 창설 당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병폐를 다같이 지적하면서 대화로써 평화공존을 모색하자는 그럴 듯한 뜻을 품고 시작됐지만, 실은 공산권 병폐보다 서방세계의 병폐를 지적하는데 치중했습니다. 이러한 때 니코딤이 회장에 당선됨으로써 그 성격이 더욱 공산주의의 선전기관 및 침투기구로 변하였던 것이고, 그들은 또한 ‘산업선교’라는 미명하에 공산주의 노동운동을 전개했는데, 이것은 세계적으로뿐만 아니라 당시 국내에서도 이로 인해 큰 소용돌이가 일어났던 바가 있습니다. 1966년 제네바에서는 “혁명을 위한 개혁”이란 주제 아래 산하교회와 사회분과 위원회가 개최되어 “보다 정의로운 사회건설을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파괴원리는 허용되어야 한다”는 공개 성명서를 채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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